<남도일보 특별기획>대한민국의 새로운 100년평화와 번영의 한반도
<3부>러시아 연해주 한인 독립운동과 신북방정책
(1)백암 박은식과 연해주 노인동맹단
(2)연해주 대한국민의회와 독립운동
★(3)연해주 우수리스크 고려인 아리랑
(4)연해주와 평화 번영의 신북방정책

러시아 이주 한인들‘아리랑’으로 한민족 정체성 확인
중앙亞 강제이주로 중앙아시아·유라시아 일대까지 전파
나라잃은 설움과 고난을 이겨낸 처절한 여정 오롯이 담겨

고려인 아리랑, 조선족 아리랑과 다른 건 문화 환경 차이
러시아 유일 한인동포기념관 ‘고려인문화센터’ 설립·운영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는 블라디보스토크 북쪽 약 112km지점, 한카호 남쪽의 저지대에 위치하며, 동해로 흘러드는 우수리강 지류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시베리아 철도와 하얼빈-목단강(牧丹江)-동녕(東寧)을 연결하는 철도와의 분기점으로 극동지역의 경제적 중심지를 이루고 있는 산업도시이다.

또한 아무르만으로 흘러들어가는 수이푼강(라즈돌노예강)과 그 지류들이 가로지른 평원에 많은 한인농촌마을들이 형성되어 있었다. 수이푼강의 비옥한 넓은 농토를 배경으로 이 지역 한인들은 부유한 생활을 영위했다. 부유한 한인 자제들이 정식 고등교육을 받은후 각처에서 교사로 활동하였으며, 특히 1917년 2월혁명 이후에 조직된 ‘사회혁명당’ 계열의 자치조직에 유력한 한인들이 진출하여 영향력을 발휘했다.

고려인문화센터 전시실에 있는 아리랑 소개글. 아리랑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고려인문화센터

항일독립운동의 중심지 연해주와 우수리스크지역은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혼을 불태운 곳이다.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는가 하며 의병을 조직해 일제와 격전을 벌였다. 또한 신문을 통한 대외 선전전을 이끌며 학교와 각종단체에서 민족계몽에도 앞장섰다. 3·1만세운동도 연해주에 번진 커다란 들불 이었다. 그들의 혼을 심지삼아 타올랐던 불꽃은 꺼지지 않은 혼불이 되어 연해주 땅을 밝히고 있다.

우수리스크에는 러시아에서 유일한 한인동포들의 기념관인 ‘고려인문화센터’가 있다. 2004년 러시아 한인이주 140주년 기념의 일환으로 건립이 시작되었다. 한국의 재외동포재단등의 후원으로 2009년 10월 개관했으며 발해시대와 고려인들의 연해주 이주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유일한 곳으로 러시아 연해주를 관광하는 한국인들이라면 반드시 찾아오는 유명한 명소가 되었다.

이 센터는 1864년 공식기록에 의한 최초의 연해주 이주부터, 독립운동 역사까지 두루 살펴볼 수 있게 구성 되었다. 특히 1937년 9월 스탈린의 강제이주로 대다수 고려인 동포들은 중앙아시아 우슈토베 갈대밭으로 가야하는 과정등이 생생하게 전시되고 있다. 이곳은 전시실 뿐만 아니라 고려인들을 위한 한글교육과 문화예술 공연장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고려인문화센터 전시실의 아리랑 LP판 .
우수리스크에 있는 고려인문화센터 전경.

◇ 고려인 아리랑

이 악보는 100년전 전쟁포로 고려인 2세가 부른 아리랑이다. 1917년 1차 세계대전 독일 러시아 전투에 러시아 병사로 참전한 고려인 2세 김 그리고리와 안 스테판이 프로이센 포로수용소에서 부른 아리랑이 에스피(SP)판 2장에서 발견 되었다. 노래가사는 다음과 같다.

“아라랑 고개 집을 짓고

오는이 가는이 정들어 주지

아라랑 아라랑 아라리요

아라랑 띄어라 노다 가자

아라랑 아라랑 아라리요

아라랑 철철철이 배 떠나간다.

요내 배는 한강 밴지

팔동의 한량이 다 타고 논다.

아라랑 아라랑 아라라리요

아라랑 철철철이 배 떠나간다.”
 

고려인문화센터에 소장된 한민족의 노래 아리랑의 악보.
독일,러시아 전투(1916)에서 포로가 된 고려인 2세./구글

고려인문화센터에는 한민족의 노래 아리랑에 대해 많은 설명을 하고 있다.

인류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는 아리랑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한민족을 대표하는 문화의 상징이다. 우리 민족에게 아리랑은 노래이상의 의미가 있고 한(恨)이 깃든 삶의 역사가 수록되어 있다. 아리랑은 19세기말 한인의 러시아 이주와 함께 러시아에 전해졌고 중앙아시아 한인 강제이주를 통해 중앙아시아와 유라시아 일대로 전파되었다. 이곳 우수리스크의 아리랑 전파경로는 지난 150년간에 걸친 고려인의 가슴 아픈 삶인 동시에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역사적 여명이다. 아이와 어른 누구라도, 언제라도, 러시아, 중국, 한국 어디에서라도 한민족은 아리랑을 부른다. 말과 글을 잊을지언정 우리 한민족은 아리랑을 배우고 기억한다. 내가 누구인가를 떠올릴 때, 내가 우리가 되고 또한 우리가 내가되는 그곳에 우리 모두의 노래 아리랑이 있다. 그 옛날 조국을 떠나 타지에서 그리운 고향을 생각하며 아리랑 노래를 불렀을 고려인들을 생각하니 왠지 슬퍼졌다. 지난 2017년 9월 6일에 문 대통령과 러시아를 방문한 김정숙 여사께서 고려인문화센터를 방문했다. 여기에서 김 여사는 고려인 2·3세들과 아리랑을 함께 부르며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 한민족 디아스포라들의 아리랑

아리랑 노래 공연 모습./연합뉴스

아리랑은 한민족의 상징적인 노래이다. 한민족이 사는 곳이면 어디를 가더라도 아리랑이 있고 누구나 한곡쯤 부를수 있는 노래가 아리랑이다. 민요 아리랑이 언제 생겨났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조선후기에 들어서면서부터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조선조 말에는 고종과 명성황후까지 듣고 즐거워하는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노래가 되었다.

일제 강점기인 1926년 나운규가 연출하고 주연을 한 무성영화 아리랑은 아리랑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아리랑의 유행과 맞물린 구한말·일제강점기는 우리 민족에게 가장 가혹한 시기였다. 수해와 기근, 삼정(三政)의 문란과 대규모의 민란이 이어진 18세기 후반부터 굶주림에 시달린 많은 동포들이 중국과 러시아 등지로 내몰렸다.

두만강을 건너, 만주를 지나, 바다를 건너서 러시아에 들어간 식민지 조선의 백성은 자신 앞에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고려인의 아리랑에는 중국 조선족의 아리랑처럼 다양하지는 않지만 이산의 고통과 험난한 삶의 자취, 이민족의 설움 등 그 시대를 견뎌낸 이들의 처절한 여정이 그대로 드러난다.
 

황토빛 두만강 전경, 건너편이 북한땅./오마이 포토

◇ 아리랑은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정체성

아리랑이 러시아와 중국 등에 스며든 지 100년이 훨씬 지났다. 1860년대 이후부터 일제 강점기에 자발적인 이주, 강제이주 등에 의해 이루어진 우리민족의 이주는 아리랑의 분포 공간을 넓혀 놓았다.

고려인으로, 조선족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부르는 아리랑에는 분명 우리와는 다른 삶의 양식이 투영되어 있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변화를 변이로 보기도 하지만 이는 각기 다른 아리랑 고개를 넘어온 이들이 풍토가 다른 문화 환경에 적응하며 만들어낸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국경을 넘은 아리랑은 그저 단순한 민요가 아니다. 아리랑은 고난의 행보속에서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을 확인하는 정서의 가락이다. 은근과 끈기를 담은 아리랑이 지금도 우리의 마음을 울리고 있다.우수리스크/글·사진=김소정 광주통일교육센터 대표강사·작곡학 박사

우수리스크 최재형 고택 앞에서 필자
김소정 박사

김소정 박사는 이탈리아에서 작곡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통일부 광주통일교육센터 대표강사로서 ‘음악을 통한 통일교육’과 찾아가는 역사교육(독도,동해)등을 진행하고 있다. 특히 통일연가를 작곡하여 ‘광주충장축제’에서 선보였으며 통일합창단의 단장(지휘자)으로, ‘한반도통일토크콘서트’의 통일 평화음악제 전체기획을 맡는 등 중요한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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