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역사이야기-96. 역사 속의 전라도 바다 사나이들

물개처럼 빠르게 바다 누비던 전라도 사나이들

능창, 신안 바다 장악했던 걸출했던 전라도인
水戰 능해 수달로 불려…왕건에 맞서다 죽음

장보고 동북아 해상 장악하고 해상왕국 건설
의동생 정년은 <삼국사기>에 ‘수영솜씨 탁월’

제주도 떠나온 두모악 전라·경상 해안 정착
배 잘 부리고 용맹 임진·정유재란 때 대활약

거문도·초도·손죽도 어부들 울릉도 왕래조업
동남서해안 오가며 바다 사나이 기개 떨쳐

해남 출신 조오련 70년대 아시안게임 2연패
‘아시아 물개’ 국위선양·애국 혼 높이다 사망
 

문재인 대통령이 2019광주수영선수권대회에서 개회선언을 하고 있다.

광주에서 수영대회가 열리고 있다. 2019광주세계수영선수권대회는 7월 12일부터 28일까지 진행된다. 이번 수영대회에는 194개국에서 2천639명의 선수가 참여했다. 선수들은 경영(競泳)을 비롯 다이빙, 아티스틱 수영, 수구, 하이다이빙, 오픈워터 수영 등 6개 종목 76개 경기에서 기량을 겨룬다. 광주여대와 조선대, 남부대에서 경기가 나눠 진행되며 오픈워터 수영은 전남 여수엑스포 해양공원에서 펼쳐진다.

오픈워터 수영은 ‘물속의 마라톤’이라 불리는 경기다. 5㎞, 10㎞, 25㎞ 코스로 나눠져 있는데 선수들은 바다에서 먼 거리를 헤엄쳐야 한다. 선수들은 거친 파도와 바람, 그리고 해파리와 같은 여러 가지 요인들을 극복하면서 수영을 해야 한다. 강한 체력과 정신력이 필수다. 수영방법은 어떤 것이나 관계없다. 체력과 속도를 감안해 선수들이 그 때 그 때 영법(泳法)을 바꿀 수 있다. 선수 대부분은 자유형을 사용한다.

여수 앞바다를 오픈워터경기장으로 삼은 것은 매우 적절한 선택이었다. 여수앞바다는 물이 깨끗하고 여수만(麗水灣)의 양쪽 육지에서 경기를 조망할 수 있다. 비록 먼 거리에서 경기를 보는 것이기는 하지만 경기를 치르고, 보기에는 최적의 바다다. 더구나 여수는 예부터 강인한 정신과 도전정신으로 가득 차 있던 바닷사람들이 살던 곳이다. 배를 부리는 것뿐만 아니라 남자는 물론이고 여자·아이들도 물질(헤엄)을 잘했다.

광주세계수영선수권대회 개막식 공연.

예전부터 바닷가에 살던 사람은 대부분 배를 잘 부리고 헤엄을 잘 쳤다. 특히 전라도 해안에는 섬이 많은 탓에 섬사람들이 많았다. 섬사람들은 바다를 오가며 바다에서 나는 것들로 생업을 꾸렸다. 그만큼 물에 뛰어드는 일이 많았다. 바다에서 물속을 다닌다는 것은 강에서 헤엄을 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물길의 깊이와 물의 속도 자체가 다르다. 특히 서해안의 경우는 물이 탁해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위험했다.

전라도 해안가는 어디서든 오픈 워터 경기가 가능하다. 그렇지만 물이 맑고 유속이 그리 빠르지 않아 여수 앞바다가 최적의 바다로 선정된 것이다. 전라도 역사 중에서 우리가 새롭게정리해야 할 부분은 ‘바다의 역사’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역사는 땅의 역사에 중점이 주어졌고 ‘바다의 역사’는 뒷전으로 밀려나있다. 아마도 그 단초는 고려 말기, 조선 초에 행해졌던 ‘섬 비우기’(쇄환정책)일 것이다.

여수엑스포해양공원에서 진행된 오픈워터 수영경기 장면.

중국대륙을 중심으로 한 문명의 유입과 중국대륙 국가들과의 주종관계는 일본과 남방(인도차이나 반도와 인디아반도)으로 이어지는 바다를 멀리하게 했다. 그렇지만 우리 선조들은 바다에서 사는 법을 잘 알았다. 물길과 바람을 헤아리며 먼 바다를 오갔다. 남도의 바다사나이들은 배를 잘 부리고 용감해 한국과 일본, 중국을 잇는 바다를 장악하고 호령했다. 왕건과 장보고, 정지, 이순신장군이 그 대표적 인물들이다.

이들 외에도 우리의 역사기록에는 바다의 영웅이었던 사람들이 얼핏 등장하고 있다. 왕건과 맞서 싸웠던 능창, 배안에서 살며 남해안과 제주도 일대 바다를 종횡무진 누비고 다니던 무두악, 여수(고흥)바다에서 동해안 울릉도·독도를 오가며 생업을 꾸렸던 초도 일대 바다사나이들, 조선관군과 일본군에 쫓기던 동학농민군 500여명을 노를 저어 수 십 차례에 걸쳐 섬으로 옮겨 목숨을 구하게 한 소년 뱃사공 윤성도, 70년대 ‘아시아의 물개’로 불리던 조오련 등이 그 주인공이다. 이번 회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거나 잊히고 있는 전라도 바다 사나이들에 대해 알아본다.

■능창(수달)

압해면 송공산성 입구에 있는 능창 기념비.

왕건은 송악(개성)일대를 무대로 성장한 해상세력 출신이다. 왕건은 궁예 휘하에서 장수로 활약하다가 서해를 타고 내려와 나주를 공격했다. 이때 왕건에게 거세게 반발한 세력이 신안 일대에 기반을 두고 있었던 능창이었다. 능창은 영산강 입구인 압해도에 주력부대를 두고 왕건과 대적했다. 압해도는 영산강의 출입을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능창의 견제와 기습공격으로 왕건은 고통을 겪었다.

신안 일대 바다를 주름잡고 있었던 능창은 수전(水戰)에 능하다하여 수달(水獺)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일부 학자들은 능창의 세력권이 지금의 신안·영광·진도·완도까지 포함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912년에 능창은 갈초도(葛草島:전남 영광군 군남면 육창마을)에 있는 소적(小賊)과 힘을 합쳐 왕건을 해치려고 하였다. 그런데 왕건이 미리 심어놓은 첩자가 이 같은 사실을 왕건에게 알렸다.

능창의 해양세력권.

이를 몰랐던 능창은 왕건을 공격하다 매복에 걸려 붙잡히고 말았다. 왕건은 능창을 궁예가 있는 태봉의 수도인 철원(강원도 철원)으로 보냈다. 궁예는 능창의 얼굴에 침을 뱉는 등 모욕을 주고 처형했다. 능창은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전라도 역사 속의 인물’이다. 왕건이 고려를 세운 역사의 주인공이 되면서 상대적으로 그늘에 파묻히게 됐다. 신안 일대 바다에서 왕건과 맞섰던 능창. 바다를 잘 알고 바닷사람들의 마음을 얻었기에 가능했던 일일 것이다.

2019광주세계수영선수권대회 공식 마스코트인 ‘수리·달이’는 수달을 형상화한 것이다. 수달은 헤엄을 잘 치는 동물이어서 수영대회 마스코트로 제격이다. 천연기념물 제330호로 지정됐으며 현재 멸종위기에 놓여 있다.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인 광주무등산국립공원의 깃대종(Flagship Species:환경보전 정도를 살필 수 있는 지표가 되는 동식물종)이기도 하다. 광주수영대회 마스코트인 수달인형을 바라보면서 동시에 먼 옛날 왕건과 자웅을 겨뤘던 ‘전라도 남자 수달’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광주세계수영선수권대회 마스코트 수리와 달이.

■장보고(張保皐)장군과 정년

장보고 장군은 통일신라시대에 완도를 중심으로 세력을 떨치며 서남해안 바다를 장악했던 인물이다. 그는 무인(武人)이자 해상무역의 거상(巨商)이었다. 그리고 당시 신라와 당, 일본 3국의 정치·경제 체제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당나라에 살고 있었던 신라인(백제인 포함)을 규합해 중국 동부해안 일대의 해상무역을 주도했다. 그 뒤 신라 서남해안(완도 일대)에 해양군사기지를 세우고 당나라-신라-일본을 연결하는 해양운송 망을 구축했다.

장보고기념공원에 세워진 장보고장군 흉상.

장보고가 지닌 군사력은 막강했다. 신라의 왕을 죽이고 새로운 왕을 세울 정도였다. 신라 왕실의 왕권다툼에서 밀려나 장보고를 찾아온 김우징의 부탁을 받고 군사 5천명을 경주로 보내 민애왕을 죽였다. 이때 군사를 이끌고 경주를 쳐들어갔던 사람이 정년이다. 정년은 어린 시절부터 장보고(궁복)와 함께 성장했던, 친구이자 동생이었다. 장보고와 함께 당나라에서 무령군 소장으로 활동했으나 중간에 장보고와 사이가 틀어져 소원하게 지냈다.

그러다 끼니를 잇지 못할 정도로 사정이 나빠졌다. 정년은 어쩔 수 없이 청해진으로 장보고를 찾아왔다. 장보고는 정년을 따뜻하게 대해줬다. 그리고 다시 그의 오른팔로 삼았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 장보고를 을지문덕, 이사부, 사다함 등 명장들과 함께 <열전>에 기록했는데, 장보고 편에서 정년에 대한 평을 남겼다.

김부식은 장보고와 정년의 청년시절에 대해 이렇게 썼다. ‘정년은 궁복이 어린 시절 경쟁하던 동생이었다. 나이는 어리지만 날램과 씩씩함에서 장보고를 능가했다. 물에서도 오래 수영할 수 있는, 매우 능력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래서 장보고는 나이로, 정년은 재주로 서로 겨루었다’ 아마도 장보고와 정년은 어린 시절에 고향 바닷가에서 놀며 꿈과 체력을 키웠을 것이다. 온종일 바닷속에 깊이 들어가고, 먼 곳까지 헤엄을 치면서 놀았을 것이다.

그러면서 먼 바다 저 곳에는 어떤 나라가 있을까? 상상력을 키웠고 그 상상력은 결국 정년을 데리고 당나라로 향하게 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정년의 수영실력은 대단했던 것 같다. 국제수영대회를 계기로 “예전에 수영을 잘하던 전라도 사람은 누가 있었을까?” 생각해보다가 찾아낸 인물이 정년이다. 그에 관한 기록이 많지 않아 아쉬울 뿐이다.

■임진왜란의 숨은 영웅, 두모악(豆毛岳)

‘두모악’(포작인)은 고향을 떠나 바다에서 떠돌며 생업을 꾸리던 ‘제주도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원래 두모악은 제주 한라산을 뜻하는 말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두모악(포작인)에 관한 기록이 수십 차례 등장하고 있다. 실록에서는 포작인(鮑作人)들을 ‘제주도 고향을 떠나 바다에서 유랑하고 있는 제주유민을 두모악, 두모야지, 포작인 등으로 부른다’고 돼 있다. 또 ‘배에서 살며 남해안 일대와 중국 해안을 오가며 고기를 잡는 사람들’이라 표현하고 있다.

두모악이 생겨난 것은 조선조정이 ‘말 교역’을 중지시키자 먹고 살기가 힘들어진 제주도 사람들이 바다로 나가면서부터다. 우리 역사에서 공식적으로 거론되지 않고 있는 ‘선상족’(船上族)이 생겨난 것이다. 고려시대 원 제국이 제주도를 군마(軍馬) 생산기지로 삼으면서 제주도 사람들은 말 교역으로 먹고 살았다. 제주도는 농사를 짓기 힘든 곳이다. 힘들게 농사를 지어도 생산량이 얼마 되지 않은 탓에 제주도 사람들은 농사보다는 어업이나 교역을 선호했다.

제주도 말은 가격이 좋아 이문이 컸다. <문종실록>에는 제주산 말의 가격에 대해 이렇게 적혀있다. ‘제주 말은 값이 본디 비싼데다가 한 마리 가격이 노비 3구에 해당하니, 나주에 오면 이미 한 곱이 되고 다른 도에 가면 또 한 곱을 더하므로 사람들이 사기 어렵다.’

제주도 말을 육지에 내다팔면 목돈을 쥘 수 있었다. 제주도 바다사나이들은 ‘배에 말을 싣고 밤에 제주도를 출발해 아침이면 육지에 가서 말을 팔고 저녁에 돌아왔다’고 전해진다. 항해술도 뛰어났지만 그만큼 자주 해남과 진도, 마량 등 육지의 포구를 다녔다는 의미다. 그렇지만 조선조정은 말 교역을 중지시켰다. 제주도 사람들은 말 교역이 막히자 소·말가죽 교역으로 살길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조정은 말 도살범들을 평안도 등지로 강제 이주시키고 밀도살과 밀교역(密交易) 관련자들을 엄하게 다스렸다. 살기가 어려워진 제주도 사람들은 배를 타고 정처 없는 유랑의 길로 나섰다. 제주도를 떠난 이들은 가족단위, 혹은 씨족단위로 배에서 생활했다. 제주도에는 고려시대 부터 큰 배가 많았다. 말을 실어가려면 큰 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말 수송에 사용되던 큰 배는 이때 가족들이 바다위에서 생활하는 용도의 ‘거주선’으로 전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형상수고본-<남환박물>

조선 초기 제주도의 인구는 4만~5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역사학자들은 여러 역사서에 근거해 제주도의 시대별 인구를 탐라국 8천 명, 고려 중기 1만 명, 고려 말 5만 명, 조선건국 이후인 1443년에는 6만 4천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숙종 30년(1704)에 제주도 목사를 지낸 이형상은 <남환박물지>(南宦博物誌) 에서 1703년의 제주인구가 4만 3천여 명으로 이전보다 줄어든 것이라 전하고 있다. <남환박물지>에는 제주의 명칭 유래 및 자연환경·인물·풍속·행정 등이 37개 항목으로 나눠져 적혀 있다.

일부 학자들은 두모악을 포함한 제주도 출륙 유랑민의 수는 당시 제주 인구의 1/3 혹은 1/2 수준으로 보고 있다. 최소 1만 명에서 2만 명 정도다. 이들은 서남해 바다 심지어 중국 요동반도 아래의 해랑도까지를 오가며 어업활동을 했다. 어떤 이들은 정유재란 이후 우리 역사에서 사라진 두모악(선상족)들이 일본 선상족의 원류가 되거나 혹은 흡수됐을 것이라 말한다.

해동지도 중 제주삼현도.

1477년 <성종실록>에는 두모악에 대한 현지 수령의 보고가 이렇게 적혀있다.

‘제주의 두독야지(豆禿也只)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처음에는 2~3척의 배를 타고 왔는데 나중에는 32척까지 늘어났습니다. 이들은 사천·고성·진주 지방에 도착해 강기슭에 집을 짓고 살고 있습니다. 의복은 왜인과 같으나 언어는 왜말도 한어(漢語)도 아닙니다. 선체는 왜인의 배보다 더욱 견실하고 빠르며, 항상 고기를 낚고 미역을 따는 것으로 업을 삼고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두모악에 대해 ‘배를 잘 부려 물결에 달려가는 것이 나는 새와 같다”는 표현이 실려 있다. 두머이 바다를 잘 알고 배를 잘 부리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두모악이 뛰어난 항해술을 지닌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두모악은 1591년 2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쓴 <난중일기>에도 등장한다. <난중일기>에서는 두모악이 제주 옛말(古語)로 어부의 뜻인 ‘보재기’로 표현되고 있다.

‘탐라사람’(보재기)이 여섯 식구를 거느리고 도망쳐 나와 금오도(지금의 전남 여수)에 머물다가 방답(防踏)을 지키는 순환선에 잡혔다고 알려 왔기에 문초 후에 승평(지금의 전남 순천)으로 압송하라고 일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순신은 두모악을 전투에 투입시켰다. 아마도 승평(순천)에 끌려온 두모악을 비롯 다른 지역 두모악들이 총동원됐을 것이다. 두모악들은 남해안 일대의 바다사정을 손바닥 보듯이 훤히 알고 있었다. 바닷물이 흘러가는 방향과 속도, 바닷물이 거세고 약하게 들고 나는 곳을 꿰고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두모악을, 조선수군을 인도하는 ‘첨병’으로 삼거나 왜수군 전선에 다가가 구멍을 내는 ‘특공대원’들로 활용했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정유재란 당시 왜 수군과 벌인 32번의 해상전투에서 32전승을 거둔 것은 두모악들의 활약에 힘입은 바 크다. 실제로 이들은 임진왜란 때 맹활약을 했다. 1592년 5월 4일에서 8일까지 출전한 이순신 장군의 전라좌수영 함대는 판옥선 24척과 협선 15척, 포작선 46척으로 편성돼 있었다. 물론 조선수군의 승리는 이순신이라는 걸출한 명장과 불리한 가운데에서도 죽음으로 싸운 조선수군들의 용감함 때문에 가능했다. 그렇지만 싸움이 벌어질 때마다 맨 앞에서 조선수군을 인도하며 왜군에게 타격을 가한 두모악이 ‘숨은 영웅’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순신 장군은 이들 포작인(두모악)에 대해 ‘건강하고 활을 잘 쏘며 배도 잘 부린다’고 평가했다. 임진·정유재란 당시 왜군과의 전투에서 사망하거나 다친 조선인 중 10%정도가 포작인이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만큼 전투의 한복판에서 용감하게 활약했다는 것이다. 두모악은 임진왜란의 숨은 영웅들이다. 지금 2019광주세계수영선수권대회 오픈워터 경기가 벌어지고 있는 여수앞바다가 두모악들이 맹활약했던 바다 중의 한 곳이다.

■울릉도·독도를 오가며 살았던 거문도·초도 바다 사나이

거문도 어부가족. 거문도를 점령했던 영국 군인들이 찍은 사진이다. 거문도 바닷사람들은 조류와 바람을 타고 여름이면 울릉도로 건너가 해산물을 채취했다. 울릉도에는 산림이 울창했는데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든 뒤 여기에 해산물들을 싣고 가을에 돌아왔다.

왜구들은 한반도 서남해안 일대의 섬에 쳐들어와 식량을 빼앗고 사람들을 납치해 갔다. 고려와 조선 조정은 섬에 살던 사람들을 뭍으로 데려왔다. 섬을 비우게 한 것이다. 이를 쇄환정책(刷還政策)이라 한다. 사람들이 살지 않은 서남해안 일대 섬에는 왜구들이 준동했다. 동해안의 울릉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비워둔 섬이기에 일본 어부들이 울릉도에 들어와 머물면서 주인행세를 했다.

조선 조정은 지속적이고 강력하게 쇄환정책을 실시했다. 태종은 두 번(1403·1416년), 세종은 세 번(1419·1425·1438년)에 걸쳐 울릉도 주민을 본토로 데려왔다(刷還). 조선 전기 이후로 울릉도에는 조선인의 발길이 끊겼다. 그러나 일본 어민들은 1625년(인조 3) 무렵부터 막부에서 울릉도 도해(渡海)를 허가받은 뒤 이곳에서 전복, 물개 등을 잡았다. 조선조정이 울릉도를 방치한 탓에 일본인들이 활개를 친 것이다.

울릉도에서 배를 건조하고 해산물을 채취하던 조선인과 일본인은 모두 불법을 저지르고 있었다. 조선인들은 울릉도에 들어가지 마라는 조선조정의 법을 어기고 있었고 일본인들 역시 울릉도는 조선의 영토이니 출입을 삼가라는 막부의 지시를 어겼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부들에게는 먹고사는 문제가 더 중요했다. 일단 울릉도까지만 오면 가득 해산물을 채취할 수 있었고 그것들을 싣고 갈 배도 만들어갈 수 있었으니 일거양득이었다.

거문도는 전라도 남해안에 있는 외딴 섬이다. 거문도를 비롯한 남해의 바다사나이들은 배를 잘 부리고 바다를 잘 알았다. 어쩌면 그들이 무두악의 후손들이어서 그런지 모른다. 남해 바다사람들은 예부터 울릉도라는 섬의 존재를 잘 알고 있었다. 거문도 일대 바다사나이들에게 울릉도는 ‘가서는 안 되는 섬’이었지만 ‘꼭 가야만 하는 섬’이었던 듯싶다. 관리들의 간섭 없이 마음대로 해산물을 채취하고 배를 만들 수 있는 울릉도는 자유의 땅이자 행복의 섬이었다.

거문도와 초도 바다 사나이들은 해마다 춘삼월이 되면 울릉도를 향해 배를 띄웠다. 그 때면 거문도에서 울릉도까지 쿠로시오 해류(黑潮)가 흘렀다. 동남풍을 타고 가면 늦어도 한 달 만에 울릉도에 도착했다. 어부들은 출발 전에 서 말의 콩을 볶아서 가져갔다고 한다. 망망대해를 가는 동안 너무도 지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콩을 먹으며 졸음을 쫓았다. 그렇게 보름 혹은 한 달 동안 조류를 타면 울릉도에 도착했다.

바다 사나이들은 울릉도와 독도 바다에서 각종 해산물을 건져 올렸다. 가을철까지 이를 말려 가득 쌓아두었다. 그리고 새로 만든 배에 말린 것들을 가득 실었다. 중간에 경상도 포구에 들려 이를 팔거나 다른 물건으로 바꿨다. 거문도에 도착하면 뗏목(목재)만 남겨두고 곧바로 서해로 배를 몰고 나갔다. 울릉도에서 말려온 건어물과 해조류를 마포 등 서해안 곳곳의 포구에서 팔았다. 평안남도에 위치한 진남포까지 올라갔다고 전해진다.

거문도와 초도, 손죽도 바닷사람들이 돛단배를 이용해 동쪽으로 500km 떨어진 울릉도를 오간 것은 대단한 일이다. 깊은 바다에서 그들은 고기를 낚아 올리고 또 한편으로는 헤엄을 치며 해조류를 건져 올렸다. 배를 잘 부리면서 물질(헤엄)에 익숙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동해 울릉도와 독도에서 활동하던 전라도 바다사나이들 덕분에 독도가 한국 영토로 남아있게 된 것도 의미 깊은 일이다.

지금 ‘독도’(獨島)라는 이름은 전라도 말에서 연유한다. 전라도 사람들은 ‘돌’(石)을 ‘독’이라 한다. 돌로 된 섬이기에 ‘돌섬’이라 했는데 돌이 ‘독’으로 변해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독도’가 됐다. 거문도와 초도·손죽도 사람들은 생계를 위해 울릉도와 독도 일대 바다를 오갔지만 결과적으로 조선의 바다와 땅을 지킨 사람들이 됐다. 울릉도와 독도 바다에서 잠수하며 헤엄치던 남도 바다사나이들이 지금 국제수영대회에 나간다면 어떤 종목에서든 금메달을 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즐거운 상상일 뿐이다.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

조오련 선수

나이 60에 가깝거나 더 많은 사람들은 수영선수 ‘조오련’을 기억한다. 조오련은 1970년 방콕아시안게임 자유형 400m와 1천500m에서 금메달을 차지했다. 그는 또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 같은 종목에서 또 다시 2개의 금메달을 획득했다. 아시안 게임 2연패를 달성한 조오련에게는 ‘아시아의 물개’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 아시아에서 가장 빨리 헤엄치는 사나이. 조오련은 국민영웅이었다.

작가는 초등학생 시절 라디오로 조오련 선수가 참가한 수영경기 중계방송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아나운서가 “국민여러분~대한민국 조오련이 금메달을 땄습니다~”라며 감격해 하던 목소리가 생생하다. 그리고 테헤란 아시안 게임이 끝난 직후 영화관에 가면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틀어주던 ‘대한뉴스’에는 어김없이 조오련 선수를 포함한 한국선수들이 등장했다. 김포공항에 도착한 조오련 선수 등이 화환을 목에 걸고 서울 시가지를 카퍼레이드 하는 장면이었다. 그러면 영화관객들은 어김없이 너나할 것 없이 박수를 쳐대며 소리를 질렀다.

조오련 선수는 해남 출신이다. 그는 17살 때 수영을 시작했다. 그리고 18살에 서울로 올라가 본격적으로 수영훈련을 받았다. 올림픽에서는 메달을 따지 못했지만 조오련은 1978년 은퇴할 때까지 50개의 한국기록을 갈아치웠다. 은퇴 후에도 조오련은 바다를 건너며 대한사나이의 기개를 세계에 알렸다. 1980년에는 13시간 16분 만에 대한해협을 건너갔다. 1982년에는 9시간 35분의 기록으로 도버해협 횡단에 성공했다.

조오련은 2000년, 대한해협을 헤엄쳐 다시 횡단했다. 또 2003년 8월 강원도 화천 비무장지대에서 여의도까지 한강 600리를 수영했다. 2005년에는 두 아들과 함께 울릉도와 독도 간 93㎞를 18시간 만에 헤엄쳐 도착했다. 조오련은 2008년 7월 독도 33바퀴를 헤엄쳐 돌기도 했다. 한 달 동안 매일 5~6㎞씩을 수영했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뜻을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조오련은 지난 2009년 8월 4일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둘째 아들이 해남군 계곡면 집 방안에서 쓰러져 있는 아버지를 발견해 급히 병원으로 옮겼으나 조오련은 결국 숨을 거뒀다. 만약 조오련 선수가 살아있다면 광주세계수영선수권대회에서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전라도에는 서남해안으로 바다가 많다. 그 바다를 터전으로 살아갔던 우리 전라도 사람들에게는 ‘물개’(수달)처럼 헤엄 잘 치는 DNA가 있는지도 모른다. 전라도의 미래는 바다에 달려 있다. 조상들처럼 바다와 가깝게 지내야 한다. 바다는 희망이자 전라도의 미래다.

도움말/강봉룡, 김재호

사진제공/임문철, 신안군, 광주수영선수권대회조직위원회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