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왜 이견을 필요로 하는가
박상훈(사단법인 정치발전소 학교장·국회미래연구원 초빙연구위원)

플라톤은 정의로운 이상사회를 꿈꿨다. 이를 위해 완전한 지식을 가진 통치 집단(철인왕)이 공동체 운영을 책임지는 국가 모델을 고안했다. 가족 및 재산과 같은 사사로운 정념에서 벗어난 통치자들이 시민들에게 직분에 맞는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 그 핵심이었다. 부도덕하고 음란한 생각에 영향받지 않도록 아이들을 교육하는 것도 그들의 역할이었다. 순수하고 완전한 도덕 공동체, 불화와 갈등이 없는 조화로운 유기체 국가를 만드는 것이 그가 꿈꾼 정의의 기획이었다.

최초로 성문헌법을 만들어 시민 정부를 세우고자 했던 미국 헌법 제정자들의 기획은 달랐다. 그들은 인간은 천사가 아니고 천사를 불러와 정부를 맡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시민은 이성만이 아니라 비합리적 정념과 배타적 이익에 이끌리는 존재라는 사실도 존중했다. 그 가운데 어떤 것이 옳고 그른 것인지 구분할 수 있을 때보다 그럴 수 없을 때가 더 많다는 전제 위에서, 갈등과 이견을 다룰 수 있는 정치체제를 만들려 했다. 누군가의 사익을 다른 누군가의 사익으로 제어하고자 했고, 인간의 야심 역시 없앨 수 없으며 오로지 다른 이의 야심을 통해 제어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권력 역시 권력을 통해 견제함으로써 전횡과 남용, 부패의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고 믿었다.

현대 민주주의의 기초를 이루는 삼권분립과 다원주의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더불어 언론·출판·집회의 권리와 같은, 이견을 가질 자유 또한 확고한 기본권으로 확립되었다. 그렇기에 베트남 전쟁 중에도 반전 집회가 열릴 수 있었고, 버락 오바마도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집회에서 인상적인 연설로 주목받는 정치가가 될 수 있었다. 전시에도 반전 시위를 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현대 민주주의가 가진 위대함이 아닐 수 없다.

이상적이고 완전한 공동체에 대한 지적 기획 혹은 발본적 혁명을 상상하는 것은 자유로운 인간 정신의 발로라 할 수 있다. 예술과 문화, 사상의 영역에서 그것은 창조와 혁신의 원천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치에서는 그럴 수 없다. 무엇보다 정치는 국가라고 하는 거대한 공권력, 즉 그 어떤 사적 폭력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위험한 공적 폭력을 관리하는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국가의 공적 결정이 과도한 확신으로 이끌릴 때마다 이견은 억압되었고 그 끝은 참혹한 비극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불퇴전의 결의와 집단적 열정은 날개 없는 인간을 낭떠러지로 이끌 수도 있다. 혁명의 완수를 내걸고 ‘계급의 적’을 제거하고자 했던 중국의 문화혁명이나, 완전한 민족공동체를 위해 인종청소를 실행했던 독일의 나치 등 인간의 역사에서 이런 사례는 끝도 없이 많다.

민주주의는 하나의 완전한 의견이 존재할 수 없다는 전제 위에 서 있다. 이견들 사이의 갈등 속에서 작동하고 그 때문에 소란스럽다. 제한된 임기를 주기로 정치세력 간 잠정적 협정(Modus Vivendi)을 반복하는 타협도 불가피하다. 아무리 그래도 전체주의와의 전쟁에서 결국 승리한 것은 민주주의였다. 인간이 만든 그 어떤 체제보다 시민적 자유와 경제적 풍요, 문화적 다양성 등에서 비교할 수 없는 성취를 가져온 것도 민주주의였다.

이견과 다원주의가 억압될 때마다 민주주의는 그 장점을 잃고 쉽게 위기에 처할 수 있음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정부나 무국가 상태보다는 국가와 정부가 있는 곳에서 인간의 자유가 더 잘 지켜지리라는 믿음으로 공권력을 만들었지만, 국가나 정부는 시민을 획일적으로 통제하려 들 수 있다. 시민은 자유롭고 정부는 책임지는 것이 민주주의지만, 이 관계는 쉽게 역전될 수 있다. 공동체를 통치할 능력이 떨어지면 국가나 정부는 인위적으로 적을 만들어 시민사회를 전쟁상태로 빠뜨릴 수 있다. ‘국가대개조’와 ‘좌익적폐청산’을 내세워 세월호 위기를 넘어서고자 했던 지난 정권의 사례가 대표적이지만, 이런 일은 언제든 반복될 수 있다.

두려움의 동원이 성공하면 내부의 적은 쉽게 만들어진다. 맹목적 단결이 강요될 때마다, 이견은 곧 이적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국가 간 분쟁 때는 더욱 그렇다. 국가 간 관계를 ‘외교적 지혜’가 아니라 ‘여론 동원’으로 이끌려 하면 할수록 불화와 충돌의 위험성은 커진다는,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의 태두 한스 모겐소(Hans Joachim Morgenthau)의 지적에 우리가 적절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두려움과 공포가 커질수록 시민은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려 한다. 시민이 아니라 국가가 자유로워지는 바로 그때가 민주주의를 위기로 빠뜨리는 순간이다. 민주주의도 얼마든지 자멸에 이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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