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3부 5장 만포진 첨사<385>

뜨악해진 표정으로 장만이 엎드린 채로 광해를 올려다 보았다.

“무슨 말씀이시온지…”

“부패지악은 선왕때부터의 전통처럼 내려왔는데, 나 역시 그것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소. 윗대가리에서부터 미관말직까지 부패하지 않은 자가 없소이다. 정 첨사의 조치는 군납비리자를 일벌백계로 다스림으로써 군 기강을 바로 잡은 거요. 잘한 일이오. 그대로 두시오.”

“그러면 조정신료들이 가만 있지 않을 것입니다. 신료 중에 죽은 자와 연루되지 않은 자가 없는데, 그들이 가만 있을까요. 소신 또한 그것을 방치한 책임이 큽니다. 그런 사실을 미처 파악하지 못한 죄가 큰 것이옵니다. 소신에게 중한 벌을 내려주시옵소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놈의 통촉, 마음에도 없는 통촉 소리 그만 좀 하시오. 정말로 통촉해드릴까요?”

늙은 장수는 주춤했으나, 그렇다고 소신을 굽힐 수는 없었다.

“그러하면 정충신을 불러서 문초해야 할 것입니다. 정충신의 능력과 애국충정을 잘 아는지라 소신, 그가 궁지에 몰리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신료들이 벼르고 있는데 내버려 두었다간 더 큰 낭패를 볼 수 있습니다. 눈에 안보이면 사건은 더 커보이고, 범죄 혐의 또한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옵니다. 그러니 데려다가 문초하고, 소신이 먼저 혼내주려고 합니다. 소신에게 생각이 있사옵니다.”

“쓸데없는 허접한 생각들, 그런 것 안하면 안되오?”

“안하면 안되옵니다. 그를 살리기 위해서도 그리해야 하옵니다.”

“정 그렇다면 그렇게 하시오.”

장만이 전령 기병을 만포진으로 보냈다. 그가 데려다 치도곤을 하면 다른 신료들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것이다. 집안이 번다하지 못하고, 저 먼 삼남지방에서 홀로 올라온 장수인지라 주변이 외로웠다. 정충신은 정의감과 군인정신으로 근무에 임하고 있을 뿐, 그를 지켜줄 변변한 배경이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그를 배제하기 좋은 구실이 되었다. 쥐뿔도 없는 것이 세도가들의 부패와 비리를 묵인하지 않는다. 적당히 타락해서 조정 신료들과 그 무리들의 수작들을 외면하면 되는데, 철두철미 원칙과 정도를 고집하고 눈감아줄 줄 모른다. 장만도 그 점 답답했지만, 씹어대는 사대부들로부터 그를 비호해야 할 책임은 있었다. 그 역시 백사 이항복 계열이었던 것이다.

전령이 출두 명령서를 들고 말을 달리고 있는 그때, 압록강변 국경지대에서 오랑캐 무리들이 정충신의 수비방어군 장졸 셋의 목을 따고, 민가의 처녀를 납치하고, 가축을 잡아간 사건이 벌어졌다. 정충신이 사건을 접하고 즉각 비상 갑호 명령을 내렸다.

“모두 출동해 나를 따르라. 오랑캐 놈들이 보이는 족족 창으로 배때지를 쑤셔박고 목을 따라!”

이렇게 전의를 불태우고 출진 준비중인데 느닷없이 비변사(備邊司)에서 회의를 소집했다.

“그런 중대한 사건일수록 사건의 개요, 진행상황, 앞으로의 대책을 논의해야 할 것 아니오?”

“지금 한시가 바쁘오. 일망타진한 뒤에 회의를 열어도 늦지 않소.”

“일망타진할 계책을 세우기 위해 회의를 소집하는 거요! 군의 전투 지침을 따라야 하오. 그 지침에는 비변사의 회의 결과에 따라 작전을 수행하게 되어있소.”

“지금 그자들이 도망가는데 회의하자고요?”

“아니, 비변사의 권위를 밟는 거요? 정 첨사의 목이 도대체 몇이나 되오?”

비변사란 조선시대 군국기무(軍國機務)를 관장한 문무 합의 기구다. 외적의 침입 등 변방에 국가적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현장 상황을 잘 모르는 중앙의 병조에서 군사 문제를 처결할 수 없어서 의정부와 육조 대신, 변방의 일을 잘 아는 지변사재상(知邊司宰相:경상도·전라도·평안도·함경도의 관찰사와 兵使·水使를 지낸 종2품 이상의 관원)으로 회의체를 구성해 작전을 수행하는 기구다. 즉 합동참모본부인 것이다.

그러나 적의 침입 보고를 받은 연후에 비상회의가 소집되어 즉각 대처하지 못하는 약점이 있었고, 사후약방문격이어서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경우는 많되, 책임만 묻는 기구로 전락해 있었다. 현장 지휘권자가 이원화되어 있기 때문에 전투명령 체계도 안잡혀있고, 옥상옥의 지휘체계가 되어 능률이 현저히 떨어졌다. 현실감각 없는 조정에서 기구를 설치하다 보니 불합리한 것들이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병조의 직속기구라서 말단까지 행세가 대단했다. 툭하면 끗발로 들이대니 현장 군인들의 불만이 많았다.

지변사 재상이 자기 말을 거역하고 정충신이 출진 대오를 갖추자 대번에 화를 냈다.

“첨사란 새끼가 비변사의 말을 안들어? 고작 백사 영감 따까리하면서 출세한 놈이 말이야. 아직도 백사영감이 살아있는 양 행세하는데, 그것이야말로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야. 제대로 말하면 곤란하지. 내 명을 거역하면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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