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3부 5장 만포진 첨사<386>

“나는 지변사재상과 말다툼할 시간이 없다.”

정충신이 이렇게 말하고 연병장에 모인 장졸들을 향해 명령했다.

“모두 출진이다. 기병부대, 궁수부대, 총포부대는 기라병의 깃발에 따라 진군한다.”

고병(鼓兵)이 북을 울리고, 기라병이 힘껏 기를 올리자 부대원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출동했다. 콩죽을 먹고 원기를 회복한 병사, 이질을 이겨내고 출병한 병사들이 더욱 용기백배했다. 그들은 전라도에서 올라온 첨방군들이었다. 자식처럼 여기며 잘 먹이고 이질병을 이기도록 이끈 은혜를 갚기라도 하듯, 그들은 한달음에 압록강을 건너 오랑캐 마을로 들어가 수색작전을 벌였다.

이 잡듯이 수색하는 사이 오랑캐 무리들이 조선군의 설욕전을 미리 알고 벌써 험준한 산속으로 숨어버렸다. 산악활동이라면 정충신에겐 평지보다 더 자유로운 지형이다. 소년시절 ‘무등산 시라소니’ 아니었던가. 산골 요소요소의 굴에 매운 연기를 쏟아부으니 숨은 오랑캐들이 켁켁거리며 기어나왔다. 나오는 즉시 목을 쳤다. 이렇게 산을 훑으면서 잔당 오십을 잡았다. 그중 30의 목을 베어서 두상을 소금에 절였다.

“저것들을 보자기에 싸라.”

“전과로 조정에 보내시게요?”

“좌우지간 싸라.”

두상 30개를 열 개씩 싸니 세 자루가 되었다. 그길로 그는 말을 몰았다. 잔여 병력을 본영으로 퇴각시키고, 정예 기병 4명만 모아 말을 달렸다.

“아니, 정 첨사 나리, 어인 일로 남쪽 압록강으로 가지 않고 서북 방향으로만 달리십니까.”

“잔소리 말고 따라오라.”

정충신은 후금의 수도 싱징(興京)으로 달렸다. 싱징은 후금 수도를 라오양(遼陽)으로 옮기는 와중이라 어수선했다. 그가 후금 궁궐에 이르러 소리쳤다.

“나는 조선국의 만호진 첨사 정충신이다. 다이샨 패륵을 찾아왔다.”

“다이샨 각하를 만난다고?”

궐의 수문장이 뛰어나왔다. 먼지 뒤집어쓴 새까만 놈이 감히 다이샨 패륵을 찾다니? 불괘감 그대로라면 칼을 뽑을 일이었다. 아이신 교로 다이샨은 후금국의 2인자였다. 형 추엥이 아비의 애첩을 겁 없이 탐하다가 졸지에 칼을 맞고 비명에 간 뒤, 차님인 다이샨이 누르하치의 대를 이을 사람으로 공인되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 누르하치와 숙부 슈르가치와 함께 광야를 누볐으며, 팔기군의 수급인 정홍기의 기주를 맡은 사람이다. 후금이 건국한 이후 바이러(패륵)로 책봉돼 명실공히 누르하치의 후계자인 것이었다. 그런 그를 조선의 먼지 뒤집어쓴 꾀죄죄한 자가 찾는다? 수문장이 그 배포에 놀랍기도 하고, 다른 일방으로 신기했다.

“당신이 다이샨 패륵을 찾는다는데 무슨 일인가.”

“그와는 친구 사이다.”

“어허, 환장하겠네. 그 꼴로 친구라고? 패륵 저하는 그런 친구는 없을 거다. 그리고 저하는 지금 사르흐 전장에 계시다. 저하가 돌아오시려면 사흘후쯤 될 것이다. 사흘후 오기 바란다.”

“그렇다면 궁에 누가 있나?”

“궁엔 왕이 계사눈데, 너를 만나주시겠냐?”

“그렇다면 그 다음의 실권자가 누구냐?”

“여덟째 아들 홍타이지 장군이시다.”

“그를 만나게 해달라.”

“그는 더 어렵다. 조선국을 좆으로 보거든.”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

정충신 일행을 요모조모 뜯어보던 수문장이 무슨 생각이 났는지 장졸을 궐안으로 들여보냈다. 장졸이 궐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와서 수위장에게 귓속말을 했다. 수문장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정충신에게 말했다.

“가져온 보자기가 선물인가?”

“그렇다.”

“보여주기 바란다.”

“보여주면 부정을 탄다. 직접 전하겠다. 수문장이 먼저 본다는 것은 예의에서 벗어나는 일 아닌가. 문명국인 조선에서는 감히 생각도 못한다.”

이렇게 야만국을 밟아야 한다. 잠시 생각하던 그가 그럴 것 같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라.”

궁궐은 이삿짐을 꾸리느라 어수선했다. 홍타이지 앞에 이르러 정충신이 보자기를 풀었다. 보자기를 보던 사람들 모두 놀랐다.

“이 두상들이 무엇인가?”

“압록강 변경을 중심으로 노략질하던 오랑캐 무리들이오.”

홍타이지가 두상을 하나하나 살피다가 무릎을 쳤다.

“아니, 이 놈은 오바부타이다 아니냐? 조선 장군! 우리가 그토록 원수로 삼던 자를 잡아오니 고맙소. 이 새끼는 부족 사이를 왔다갔다 하며 우리를 괴롭혔던 놈이요. 사르흐전쟁 때문에 이 놈 추적을 못했는데, 대신 잡아주어서 고맙소. 앓는 이를 뽑은 기분이오. 소연(小宴)을 열겠소. 형의 친구라면 나와도 친구요. 안그렇소?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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