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역사이야기-97. 조선과 12척의 배(上)

아베의 패권주의 ‘2019 한일경제전쟁’을 부르다

韓 대법원, 징용판결에 日 원자재수출규제로 공격
일본 기술력, 한국보다 월등 産業克日 국가과제

일본 공세 장기화되면 한국경제 벼랑 끝 상황
한일 공멸 피하려면 정상회담으로 갈등 풀어야

壬亂 당시 조선 구한 것은 이순신과 12척의 배
국민 개개인이 모두 이순신, 마음 모아 극복해야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수출규제로 한국을 압박하고 있는 일본 아베 총리. 문재인 대통령은 국민의 단합된 힘으로 일본을 극복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열두 척의 배’ 언급

일본의 수출규제로 인해 한일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이런 가운데 문재인 대통령은 일본의 경제도발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으로 ‘국민들의 단합’을 제시했다.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12척의 배로 조선을 지켜낸 역사적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위기극복에 힘을 모아줄 것을 당부한 것이다. 문 대통령은 2019년 7월 12일 무안에서 열린 ‘전남 블루 이코노미 경제 비전 선포식’ 연설에서 “전남의 주민들이 이순신 장군과 함께 불과 열두 척의 배로 나라를 지켜냈다”고 힘주어 말했다.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해낸 ‘전라도 백성’과 ‘이순신 장군’의 불굴의 의지를 강조한 것이다. 문 대통령이 임진·정유재란 당시 ‘불과 12척에 불과했던 조선수군의 배(戰船)’를 언급한 것은 일본의 경제보복 사태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었다.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원균이 지휘하던 조선수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해 궤멸 당했다. 배설이 지휘하던 조선수군 전선 12척만 살아남았다.

조선을 침략해 숱한 인명을 살상하고 인재와 물자를 약탈해간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수많은 위기 속에서도 지혜와 뛰어난 전략으로 조선을 지켜낸 충무공 이순신.

이에 반해 남해안 일대를 뒤덮은 왜 전선 수는 600여 척에 달했다. 규모와 전력 면에서 조선수군은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12척(후에 1척을 더해서 13척이 됨)의 배로 명량해전에서 왜 수군을 격파했다. 13대 133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이다. 이후 해상주도권은 다시 조선수군으로 넘어갔다. 이때 조선 수군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모든 힘을 쏟아부은 사람들은 전라도 백성들이었다.

지금의 보성을 중심으로 해 강진·해남·진도·장흥 사람들이 배를 젓는 격군으로 나서고 식량과 화약을 모아 이순신 장군에게 건넸다. 전라도 백성들의 땀방울과 이순신 장군의 지략은 결국 조선을 살려냈다. 문 대통령은 일본의 경제보복으로 자칫하면 국가경제가 곤두박질칠 수 있는 위급한 상황을 ‘12척에 불과한 조선수군의 절박한 처지’에 대입시킨 것이다. 우리가 힘과 지혜를 합치면 일본과의 경제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일본이 한국의 숨통을 끊기 위해 대규모 기습(수출규제)을 해왔지만 결국 우리가 이겨낼 것이라는 희망 섞인 비유였다. ‘12척의 배’로 역전을 이끌어낸 것은 분명한 해피엔딩이었다. 그런데 그 막강했던 조선수군이 어떤 이유 때문에 망가져버렸는지, 그 비극의 원인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다. 일본과의 경제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교훈(反面敎師)를 얻으려면 ‘12척의 비극’이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에 대한 면밀한 고찰이 필요하다.

■조선수군의 전력

명화가가 그린 정왜기공도권에 나오는 조선수군의 왜수군 공격장면. 우측에 조선수군의 깃발이 보인다. /최종만 제공

○임진왜란 전 조선수군 보유 전선은 982척(이중 판옥선은 100여 척)

임진왜란이 터지기 전에 경상·전라 양도의 수군 장수는 경상좌수사에 박홍, 경상우수사에 원균, 전라좌수사에 이순신, 전라우수사에 이억기(李億祺)였다. 당시 조선 수군이 소유하고 있었던 판옥선(板屋船) 수는 모두 100여 척으로 추정된다. 판옥선은 조선수군의 핵심 전투선이었다.

판옥선은 선체 위 전면에 걸쳐 상장(上粧)을 꾸려 2층으로 꾸민 옥선(屋船)이다. 쉽게 말해 2층 구조의 전투함이다. 갑판과 갑판사이에는 노를 젓는 격군(格軍)들이 배치됐다. 격군들이 적에게 노출될 위험이 없어졌다. 거기다 전투를 하는 군졸들은 상장 위의 높은 곳에서 적들을 내려다보며 싸울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배가 높아 적이 선상에 기어올라 침입하지 못하고, 포를 높게 설치한 탓에 적의 위치를 쉽게 파악해 포격을 가할 수 있는 이점도 있다. 판옥선은 밑바닥이 편편하고 넓었다. 밑바닥이 U자여서 방향전환이 쉬웠다. 또 소나무로 만들어져 매우 튼튼했다. 그래서 무거운 화포를 실을 수 있었고 장거리 사격이 가능했다. 게다가 충격에 강해 육박전에 유리했다.

판옥선에 덮개를 씌운 것이 거북선이다. 이순신 장군과 나대용은 거북선에 지자총통과 현자총통을 부착했다. 그리고 판옥선과 거북선에 맞는 전술을 개발했다. 즉 적선과 마주치면 먼 거리에서 화포사격을 해 타격을 입힌 뒤 가까이 다가가 들이받는 전투방법을 도입한 뒤 수군들을 조련했다.

이에 반해 일본 수군의 전함인 안택선(安宅船:아다카부네)과 관선(關船:세키부네)은 주로 삼나무와 전나무를 이용해 만들어졌다. 그래서 전선 건조에는 대부분 얇은 판재가 사용됐다. 그런 만큼 안택선과 관선은 가벼웠다. 속력이 빨랐다. 하지만 배 밑바닥이 V자 형태여서 급히 방향을 바꾸기가 힘들었다. 전선들이 뒤엉켜 싸우는 해상육박전에는 취약했던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일본 전선들이 가벼워 무거운 화포를 싣지 못하고 있음을 간파했다. 그리고 육중한 배가 들이받으면 일본 전선이 쉽게 깨진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해전이 시작되면 화포로 타격을 입힌 다음 곧바로 충돌해 배를 깨부수는 전술을 사용했다. 일본 수군은 상대의 배에 뛰어올라 싸우는 근접전에 강했다. 판옥선과 거북선이라는 전선을 보유한 조선수군의 전력은 매우 강해졌다.

■ 조선 경상좌·우수사 수군이 와해되다

일본화가가 그린 임진왜란 해상전투도. 일본 수군이 조선 수군의 배에 올라(등선·登船) 치열한 백병전을 벌이고 있다.

정유재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800여 척의 일본군 전선에는 제1군 1만8천명이 타고 있었다. 일본 수군의 공격으로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대는 거의 괴멸됐다. 경상좌수사 박홍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일본군에게 빼앗길 것을 염려해 전선과 전구(戰具)를 모두 침몰시켜버렸다. 단지 4척의 전선만 남았다. 수군도 모두 흩어져 버렸다.

임진왜란 발발 당시 조선수군이 보유하고 있던 판옥선이 몇 척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렇지만 첫 해전이었던 옥포해전(玉浦海戰)에 동원된 판옥선은 28척이었다. 이순신 휘하의 전라좌수사 소속 판옥선이 24척과 경상우도 소속 4척의 판옥선 등 모두 28척이었다. 2차 해전인 당포해전(唐浦海戰)에서는 전라좌도 소속 23척, 전라우도 소속 25척, 경상우도 속속 3척 등 모두 51척의 판옥선이 참전했다.

이런 사실을 고려해볼 때 임진왜란이 터지기 직전,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에는 각각 50척 정도의 판옥선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으로는 100여 척의 판옥선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일본수군 주력부대가 경상도 지역의 조선수군을 격멸시키고 또 배를 빼앗길 것을 염려해 조선수군이 스스로 파괴시켜버린 결과 50여 척의 판옥선만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의 조선수군, 잇따라 일본 수군을 격파하다

조선 수군의 주력함 판옥선.

조선의 수군은 전라좌·우수사 휘하의 수군과 전선이 주축이 됐다. 임진왜란 초기 경상좌·우수사가 괴멸돼 버렸기 때문이다. 당연히 조선수군의 실질적 지휘자는 이순신 장군이었다. 1592년 5월 4일에서 8일에 걸쳐 벌어진 옥포(玉浦)·합포(合浦)·적진포(赤珍浦) 해전에서 이순신 함대는 적선 37척을 불에 태우고 부수는(焚破) 대승을 거두었다. 이순신 장군의 전라좌수영 함대는 판옥선 24척과 협선 15척, 포작선(두모악이 타고 다니던 배) 46척으로 편성돼 있었다. 조선수군의 피해는 경상자 1명뿐이었다.

제2차 해전은 5월 29일에서 6월 10일까지 사천(泗川)·당포(唐浦)·당항포(唐項浦)·율포(栗浦) 등 네 곳에서 벌어졌다. 이 싸움에서 조선수군은 일본 전선 72척을 침몰시키고 왜군 88명을 죽였다. 조선수군의 피해는 전사 11명, 부상 26명이었다. 특히 사천 해전에서부터는 거북선이 투입돼 가공할 위력을 발휘했다.

3차 해전은 7월 6일부터 13일 사이에 있었다. 6일 이순신 장군은 이억기와 함께 90여 척을 이끌고 전라좌수영을 떠나 남해 노량(露梁)에 도착했다. 여기에 경상우수사 원균의 수군이 합류했다. 이순신과 원균은 견내량(見乃梁)에 정박 중인 일본 전선을 한산도(閑山島) 앞바다로 유인해 59척의 크고 작은 적선을 불태우거나 쳐부쉈다. 대승리였다.

4차 해전은 8월 24일부터 9월 2일에 걸쳐 부산진 일대에서 벌어졌다. 조선연합 함대는 일본 수군 전선 470여 척이 정박돼 있는 부산진 내항으로 진격해 적선 100여 척을 파괴했다.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수군에 연전연패를 당하자 일본 수군은 이후 바다에서 싸움을 하지 않고 조선수군이 나타나면 줄행랑을 쳐 병사들을 육지로 올려 보내기에 바빴다.

이로써 조선수군은 남해바다를 장악하게 됐다. 조선수군이 제해권을 장악하자 일본의 조선침략은 난관에 봉착했다. 조선수군을 전멸시킨 뒤 남해-서해안을 거쳐 한양까지 병사와 물자를 실어 나르려 했던 일본의 계획은 좌절됐다. 거기다 조선의병들이 곳곳에서 일어나 보급로를 끊고 일본군을 괴롭혔다. 조선이 일방적으로 밀리던 전세는 역전됐다.

도움말/김세곤, 정만진, 최종만

사진제공/위직량, 국립해양박물관, 전남도, 네이버지도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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