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3부 5장 만포진 첨사<392>
왕이 정충신에게 물었다.
“압록강과 두만강의 길이가 얼마이던고?”
“압록강은 백두산의 최고봉인 병사봉 근처에서 발원하여 굽이굽이 이천리 물길을 따라 서해 바다에 이릅니다. 압록의 북안은 여진의 후예인 후금이 흥기하고 있으며, 남안은 조선의 함경도 일부와 평안도를 관류합니다. 강의 양안에서 우리 백성과 오랑캐가 섞여 농사를 짓고 살았습니다. 달밝은 밤에 들려오는 오랑캐의 피리 소리는 병사의 애간장을 녹였지요. 그러나 흔들리지 않고 국방 의무에 충실했습니다. 산 빛, 물 빛, 여인의 얼굴빛이 고운 강계, 태조대왕이 회군한 위화도, 인물의 고장 의주와 정주를 품고, 진실로 맑지 않은 것이 없는 청천강과 박천을 압록이 품고있는데, 그곳을 연년세세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하지요.”
“두만강 쪽은 어떠한가.”
“두만강 역시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동해의 녹둔도에 이르기까지 천삼백 리 길을 흘러갑니다. 나라 안에서 가장 추운 중강진에서 뜨거운 심장 박동을 확인하면서 웅비의 꿈을 꾸고, 남성미 넘치는 거친 산맥을 품고 유장하게 흘러가는 물입니다. 백두대간이 시작되는 곳, 백두산 맑은 물이 흘려보내는 동해안은 나진에서 청진 함흥 원산 속초까지 꿈길 같은 해안선이 길게 뻗어있습니다. 이 땅을 지키는 것은 바로 조선민족의 혼이 서린 땅을 지키는 일과 같사옵니다. 두만강이 흐르는 남쪽으로는 말을 타고 활을 쏘며 자란 태조대왕, 이자, 성자, 계자의 태자리가 있는 함흥이 있고, 나라 안에서 두 번째로 높은 관모봉과 고밀반도를 중심으로 한 삼지연, 청진의 맑은 바다와 칠보산 개심사, 백무고원 일대에 자리한 금맥, 천태만상의 금강산과 신계사, 이순신 장군의 첫 부임지 삼수, 어느것 하나 버릴 것없는 산하를 품고 있는 강이옵니다. 저는 두만강에 이어 압록강 변경을 지키고 있사온데, 양 국경을 지키는 보람으로 군인의 긍지를 느끼며 살아왔사옵니다. 두 곳 모두 후금과 국경선을 맞대고 있습니다. 후금과 불가침 화약을 맺는 동시에 우리의 국방력을 튼튼히 하는 방책을 세워야 한다고 진언 올리는 바입니다.”
“이런 충성스런 군인을 내치려 했단 말이냐.”
왕이 한심스럽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찼다.
“황공하옵니다.” 장만이 머리를 조아렸다.
“우리가 백두산 서쪽 압록강 이천 리와 동쪽 두만강 천삼백 리를 후금과 맞대면하고 있다고 했겄다. 그 두 곳을 정충신 첨사가 수비방어하고 있다고 했겄다? 보다시피 그곳은 후금 땅의 개짓는 소리, 닭 우는 소리, 아이 울음소리까지 우리 국경에 닿고 있다. 이런 나라를 지키는데, 이들 나라를 배척하고 산길 물길 돌아돌아가는 명나라에 신명을 바치자는 것이 어디서 굴러먹다 망가진 헛소리더란 말이냐. 그것도 무너져가는 기둥을 붙잡고 함께 망해가는 꼴을 보아야 정신을 차리겠다는 것이냐. 한심한 것들, 죽어봐야 저승 맛을 알고, 찍어먹어 보아야 인분인지 된장인지 분별한다는 것이냐. 그러면서도 자기 가진 것 삣길까봐 눈망울 굴리고, 작은 이익이라도 있으면 미친 듯이 달려드는 작태를 볼 냥이면 하루에도 수십 번은 가슴에서 천불이 일어난다. 그런 새끼들이 과인을 불효라고 탄핵할 것이라고?”
광해도 시중의 소문을 듣고 있었다.
“황공하옵니다. 마마.”
“너희가 황공할 것이 없다. 과인이라고 해서 허물이 없겠는가. 선왕 시절 세자 자리 하나 놓고 얼마나 시달려왔는가. 그때 내 쓸개는 모두 닳아서 없어져버렸다. 그래서 요즘에도 작은 것에 깜짝깜짝 놀라고, 소심해지고, 남을 의심하는 버릇이 생겼다. 하지만 임란 이후 찢어지고 망가진 나라를 다시 세우기 위해서 얼마나 노심초사하였는가. 나라를 일으키기 위해서 강공법을 쓰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저희는 알고 있사옵니다.”
“내외 정세에도 밝아야 하는 것이 사대부 아닌가. 이미 읽은 낡은 사서삼경에 매달려 고리타분한 사고에 젖어있는 수구적 태도가 아니라 외세의 흐름도 살펴야 하거늘, 자기 가진 것 지키려고만 한다. 내외 정세를 살피고 중립외교, 실리외교를 펴자고 대안을 내는 사람을 매국노로 병신 만들어버리는 저들의 태도를 보면 못된 새끼들이란 생각이 든다.”
그는 요즘 이이첨의 태도에도 화가 나있었다. 힘을 실어주었더니 어느새 대드는 꼴을 보여준다. 왕 즉위 이후 정사에서 죽이 맞아 떨어지고, 관옥(冠玉)도 시원해 총애한 나머지 대북파의 영수로까지 올려주고 국정 주도를 위임했는데, 세도가 높아지니 대드는 것이었다.
광해가 어전 중신회의에서 중립외교 언질을 주면 이이첨은 “후금 사신 목을 베고 후금과 한판 싸우자”고 나섰다. 광해가 “그대가 한번 붓으로 싸워보지?” 라고 비아냥대니 이이첨은 “부모와 같은 명나라 사마(司馬:중국 군정의 책임자)가 맹수 같은 오랑캐들에게 당하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나이까”하고 항변했다. 그는 명나라 조정의 조종을 받고 있었다. 황당해한 건 광해 뿐이고, 소북의 류희분 등 유자(儒子:유학의 선비)들마저 이이첨의 반발에 감동했다. 역시 사대주의는 사대부의 주이념이었다. 광해는 사방에 적으로 둘러싸여 있는 셈이었다.
“정 첨사는 지금 당장 변경으로 가라.” 왕이 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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