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3부 5장 만포진 첨사<393>

정충신이 만포진에 귀임했을 때 오랑캐 부족이 또다시 국경선을 침범했다. 이번에는 그 규모거 커서 피해가 극심했다. 다분히 보복의 냄새가 짙었다. 후금의 세가 아직 하부의 소소한 부족에까지는 미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정충신은 이 사실을 조정에 알렸다. 조정에서는 정충신에게 외교 차사로 후금에 가도록 긴급 명령했다. 누르하치는 명나라 요충지 심양을 공략해 탈취한 뒤 날로 전선을 확장하고 있었다.

1621년 8월, 중국 내륙에도 무더운 여름의 태양이 내리쬐고 있었다. 정충신은 심양을 찾아 누르하치 앞에 섰다. 누르하치는 정충신을 무시하는 태도였다. 정충신의 명성을 아는지라 사신으로 받아들였던 것인데, 기세를 꺾으려고 기치창검(旗幟槍劍: 깃발·칼·검의 총칭)을 든 군사들을 단에 배치하고, 금부은월도(金?銀鉞刀:의장의 한가지. 나무로 만든 것으로 금칠한 나무 도끼와 은칠한 나무도끼)를 좌우로 세워 위엄있게 보위하도록 하면서 권위를 과시했다. 그 옆에는 한 여름인데도 이글이글 타는 숯불에 쇠창을 달구고, 기름솥의 기름이 부글부글 끓었다. 여차하면 기름솥에 집어넣어버릴 분위기였다.

누르하치 옆에는 용장과 강병을 도열시켜 명령만 떨어지면 금방이라도 출진할 태세로 기세가 위압적이었다. 정충신은 기죽지 않고 의연하게 서있었다.

“조선에는 그렇게도 인물이 없단 말이냐? 소소인(小小人:작고 못난 사람)을 보내다니.”

용상에 앉은 누르하치가 거만하게 정충신을 내려다보며 시쿤둥하게 말했다. 그 첫마디로 정충신의 기를 꺾어버리겠다는 태도가 역력했다. 정충신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조선국에서는 사람을 쓰는데도 법도가 따로 있지요. 예의를 잘 지키고 도덕을 숭상하는 나라는 대대인(大大人:크고 잘난 사람)을 보내지만, 힘만을 주장하는 무도한 나라에는 소소인을 보냅니다. 내가 후금에 특사로 오니 과연 대장은 소장부를 알아보시는구려. 그런데 나같은 소장부가 무엇이 두려워서 이렇게 창검의 숲을 이루고, 가마솥을 부글부글 끓이며 맞이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우리의 풍습이다. 우리의 풍습을 버리란 말이냐?”

“사신을 맞이하려면 상대국의 처지도 감안해야지요.”

누르하치가 잠시 생각 끝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정충신을 영접하여 높은 자리에 앉도록 권했다.

“내 아들들에게서 그대의 소문을 들었노라. 그대의 용기와 담력, 지혜는 본받을 만하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썩 좋지 않다. 어제의 일이 오늘 틀어지고, 내일의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전선의 전황이란 늘 그런 것이다. 그러한즉 나의 마음이 불안정하다는 것을 알아주기 바란다.”

“나는 대장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조선국의 불만을 말하고자 온 것이오이다.”

그러자 누르하치가 버럭 화를 냈다.

“뭣이? 나도 불만이 많다. 너의 나라는 명나라에 글을 보낼 때마다 우리를 가리켜 도적이니 종놈이니 하는데 그 까닭이 무엇이냐?”

“우리나라는 도적을 잡으면 죽이지 않고 종으로 부리는 풍습이 있습니다. 귀하의 나라에서 무리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우리 땅에 침범하여 노략질과 인명을 살상하니 잡아서 종으로 쓰고 있습니다. 누르하치 대장이 천하를 도적질할 마음으로 있으니 그보다 더큰 도적이 어디 있습니까. 큰 도둑, 작은 도둑이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나를 두고 대도라고 했겄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자식들은 무엇인가?”

“불행히도 나의 친구들도 대도의 자식이 됩니다. 그러나 천하의 도적이 만백성을 구하는 일을 하면 누가 도적이라 하겠습니까. 시대의 걸물이지요. 영웅이 됩니다. 그 자식들 또한 아비의 의로운 행적을 이을 것입니다. 의로운 행적은 헛되지 아니합니다.”

그 말을 듣던 누르하치가 큰 소리로 “가아(可兒), 가아!” 하며 껄껄껄 웃었다. ‘가아’란 여진말로 “잘난 사람”이란 뜻이다. 누르하치가 말했다.

“그대는 소소인이 아니다. 나의 이런 위세에 많은 사신들이 떨고 말도 못하고 꽁지 빠지게 물러갔다. 과연 대물이로다. 헌데 내가 일보던 중로(中路)에 그대가 왔기로 부랴부랴 왔는데, 밖이 위급한 상황인지라 내 지금 나가봐야 한다. 내 대신 나의 신임하는 호장(胡將) 언가리(彦加里)가 있으니 이 사람과 상의하라.”

그가 한켠에 서있는 언가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누르하치가 일어서자 대부분의 장수와 의장대가 철수했다. 언가리와 누르하치의 사위 올고대, 장수 이영방, 소두리 등 실무진이 자리에 남았다. 게르로 자리를 옮긴 다음 언가리가 물었다.

“각기 국경을 지키며 서로 침입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방도가 좋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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