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3부 5장 만포진 첨사<394>

“신의가 있어야지요.” 정충신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무엇을 신의라고 하오이까?”

“한번 말이 입에서 나오면 반드시 지키고 어기지 않는 것이 신의입니다.”

“우리 후금과 조선 간에 화목한 이웃으로 왕래한 지가 벌써 3년이 지났는데, 아직 끝내지 못한 것이 있소이다.”

정충신이 의아해서 물었다.

“끝내지 못했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요?”

“맹약을 끝내지 못했다는 것이오.”

정충신은 왕의 친서를 가지고 왔으나 내놓지 않았다. 누르하치의 안하무인의 태도가 반발을 샀고, 이런 때 친서를 내놓는다는 것이 굴욕적이어서 상황을 보기로 한 것이다.

“신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니, 굳이 맹약이 필요 없지요. 소신이 조정의 명을 받고 떠나올 때, 맹약 얘기는 듣지 않았으니, 여기서 제가 독단적으로 처리할 수 없습니다. 신의를 증명하는 것은 강홍립·김경서 두 장수를 돌려보내면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 말을 묵살하고 언가리가 말했다.

“우리 후금과 교류한다면 앞으로 명나라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점을 묻고 있소.”

언가리는 명과의 군신 관계만이 관심인 모양이었다. 조선이 국경을 맞대고 있다면 당연히 후금과 관계를 가져야 하는데 미적거리는 대신 수천 리 떨어진 명과 군신 관계를 맺고 있다. 사실 정충신은 후금과의 맹약을 바랐고, 조정에 들어가서도 강조했던 주장이다. 하지만 전통 사대부는 명에 대한 사대주의가 뼛속까지 박혀있어서 씨알이 먹히지 않았다. 왕 역시도 그 견고한 사대의 벽을 뚫지 못했다.

“명과 교류를 단절하지 않겠는가?”

“이미 신하로 명나라를 섬겼으니, 이것은 아들이 아버지를 섬기는 것과 같소이다. 새 이웃이 생겼다고 옛 신의를 버릴 수 없습니다. 서로 선의로 받아들인다면 옛 신의도 지키고, 새 신의도 만드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고 봅니다.”

“옛 신의와 새 신의 간에는 적대적인 관계요. 어떡하겠습니까.”

“공존이 어렵다면 세를 따라가는 것이 현실적 대책이겠지요.”

“맞소. 썩은 기둥 붙잡고 뭐하겠소? 우리는 정충신 사신과 함께 일하기를 바랍니다.”

누르하치가 전장에서 묻힌 먼지를 씻어내느라 온천을 들러 요양성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연락이 되었던지 그는 연금이 된 강홍립 도원수와 김경서 부원수를 정충신의 숙소에 보내주었다.

“같은 나라 사람이 이곳에 모였는데 어찌 보고 싶은 마음이 없겠는가. 대화하고 회포를 푸시오.”

이렇게 해서 정충신은 1차적인 교섭 성과를 냈다. 정충신은 그들과 뜨겁게 해후했다. 그러나 김경서와 강홍립이 서로 으르렁거렸다. 숙적 관계임을 당장 알 수 있었다.

“부하들을 다 죽여놓고 어떻게 맨 정신으로 돌아간단 말이오. 칼을 빼물고 죽어야지.”

“그렇다면 그대는 뭘했는가.”

주먹 다짐만 없었다 뿐이지, 두사람은 거침없이 다투었다.

“남의 나라에 와서 포로로 잡혔으면 어떻게 빠져나가야 하나, 나라의 녹을 먹은 사람이면 어떻게 이 난국을 헤쳐나갈 것인가를 궁리해야 할 것 아니오? 지금 뭐하자는 수작이오?”

정충신이 나무랐다. 다음날 누르하치가 갑자기 불렀다. 누르하치는 또다시 문제 제기를 했다.

“조선이 멀리 사신을 파견하여 문안하고 예물을 주니, 나도 사신을 파견하여 한양에 가서 조정에 사례하려고 하는데, 우리의 사신을 데리고 가겠는가, 어쩌겠는가?”

정충신이 펄쩍 뛰었다.

“우리나라는 동쪽으로는 왜나라와 교류하고, 북쪽으로는 후금과 접했는데, 최근 외국 사신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 일은 새로운 일이니, 어찌 감히 독단적으로 허락할 수 있겠습니까?”

후금의 사신이 조선에 들어가면 국내 사정으로 보아 그의 목이 온전하다고 볼 수 없었고, 온전하더라도 신하들은 오랑캐를 데리고 왔다고 방방 뜰 것이니 그것을 어찌 들어줄 수 있겠는가. 이런 사정을 후금 사신은 적나라하게 지켜볼 것이다. 그래서 사신 파견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다. 정충신이 대답이 없자 호장 언가리가 나섰다.

“귀국이 사신을 파견하여 방문하니 우리도 사신을 파견하여 답례해야 하오. 그것이 예의를 지키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예를 행하려고 하는데 왜 사신과 서신을 거절하려고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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