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3부 5장 만포진 첨사<397>

정충신이 ‘만운집’에서 밝힌 후금 군사제도와 군사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임금에게 올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군대는 8기(旗)가 있는데, 25초(哨)가 1부이며, 400명이 1초(哨)입니다. 1초에는 별초(別抄)가 100명, 장갑(長甲)이 100명, 단갑(短甲)이 100명, 양중갑(兩重甲)이 100명입니다. 별초는 수은(水銀) 갑옷을 입었기 때문에 수많은 군사 중에서도 뚜렷해서 알아보기 쉽고, 행군할 때에는 뒤에 있고 주둔할 때는 가운데 있는데 오직 승부를 결판내는 데에만 쓰입니다. 양중갑은 성을 공격하고 호를 메우는 데에 쓰입니다. 1기(旗)의 군사는 모두 12000명이니, 8기면 대략 96000기(騎)입니다. 누르하치가 직접 2기를 통솔하는데 그중 1기는 아두가 거느리고, 황색 깃발에 그림이 없습니다. 1기는 대사가 거느리는데 황색 깃발에 황룡이 그려졌습니다. 귀영개가 2기를 통솔하는데 그중 1기는 보을지사가 거느리고, 붉은 깃발에 그림이 없습니다. 1기는 탕고대가 거느리는데 붉은 깃발에 청룡이 그려졌습니다. 홍태주가 1기를 통솔하고 동구어부가 거느리는데, 흰 깃발에 그림이 없습니다. 망가퇴가 1부를 통솔하고 모한나리가 거느리는데, 푸른 깃발에 그림이 없었습니다. 누르하치의 조카 아민태주(阿民太主)가 1기(旗)를 통솔하고 그의 동생 자송합이 거느리고 있는데, 푸른 깃발에 흑룡이 그려졌습니다. 누르하치의 손자 두두아고가 1부를 통솔하고 양고유가 거느리는데, 흰 깃발에 황룡이 그려졌습니다. 통사(統司)와 초대(哨隊)에도 각자 깃발이 있는데 크고 작은 구분이 있으며, 군사들에는 투구 위에 작은 깃발을 꽂아 구분합니다. 부대마다 각기 황갑(黃甲) 2통(統), 청갑(靑甲) 2통, 홍갑(紅甲) 2통, 백갑(白甲) 2통이 있으며, 싸움을 할 때에는 부대마다 압대(押隊) 1명이 붉은 화살을 갖고 있다가 떠들거나 질서를 어지럽히며, 혼자 전진하고 혼자 후퇴하는 자가 있으면 붉은 화살로 쏩니다. 그리고 싸움이 끝나고 조사하여 등에 붉은 흔적이 있는 자는 경중을 불문하고 베어 버립니다. 싸움에 이기면 재물을 거둬들여 여러 부대에 두루 나눠주고, 공이 많은 자에게는 1인분을 더 줍니다(번역출처:정묘호란 병자호란).

(其兵有八部, 二十五哨爲一部, 四百人爲一哨。一哨之中, 別抄百、長甲百、短甲百、兩重甲百。別抄者, 着水銀甲, 萬軍之中, 表表易認, 行則在後, 陣則居內, 專用於決勝。兩重甲, 用於攻城、塡壕。一部兵凡一萬二千人, 八部大約九萬六千騎也。老酋自領二部, 一部阿斗嘗將之, 黃旗無劃; 一部大舍將之, 黃旗?黃龍。貴盈哥領二部, 一部甫乙之舍將之, 赤旗無劃; 一部湯古台將之, 赤旗?靑龍。洪太主領一部, 洞口魚夫將之, 白旗無?; 亡可退領一部, 毛漢那里將之, 靑旗無?。酋姪阿民太主領一部, 其弟者送哈將之, 靑旗?黑龍; 酋孫斗斗阿古領一部, 羊古有將之, 白旗?黃龍。 統司、哨隊, 亦各有旗, 而有大小之分, 軍卒則?上, 有小旗以爲認。 每部各有黃甲二統、靑甲二統、紅甲二統、白甲二統, 臨戰則每隊有押隊一人佩朱箭, 如有喧呼亂次, 獨進獨退者, 卽以朱箭射之。戰畢査驗, 背有朱痕者, 不問輕重而斬之。戰勝則收拾財畜, 遍分諸部, 功多者倍一分).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후금군대의 편제와 팔기군 제도를 적시한 글은 지금까지 없었다. 팔기군은 1601년 누르하치가 여진 각부족의 부대를 통합해 깃발로 구분하는 군단으로 재편한 군대였다. 이후 몽골을 침략, 병탄하면서 몽골군도 이 시스템에 편입했고, 한족도 이 군사제도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만주인으로 구성된 원조 팔기를 만주팔기라 칭하고, 몽골인은 몽골팔기, 한족은 한군팔기라 불렀다. 한족 군대와의 싸움에서 포로로 잡은 군사, 베이징 인근의 농민들도 받아들여 팔기군에 편입했다. 사르후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조선 원정군 포로들은 팔기의 일부로 흡수, 편제되었다.

타부족을 팔기군 속에 두어 여진 출신과 함께 서열을 매겼으나 차별은 없었다. 각기 다른 여진부족과 타국 병사를 끌어들이면서 강성군대를 일으켰는데, 강성군대의 비결은 군사에 따라 서열을 매겼으나 차별을 두지 않은 데서 오는 성과물이었다.

정충신은 이같은 내용을 빠짐없이 적어 조정에 보냈다. 빈틈없이 후금에 대비해야 한다는 충언과 함께, 후금과의 관계를 정상화해야 한다는 논지도 덧붙였다. 그러나 조선 사대부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럴수록 명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이에따라 후금은 나날이 조선에 대한 불만을 가졌다.

언가리와 대해가 정충신을 찾아왔다. 대해가 불쑥 편지를 내놓았다. 표하수비(標下守備) 조성공이 모문룡 유격에게 보낸 편지였다. 그 편지에는 ‘속히 대병을 보내어 조선에 잠복시켰다가 조선과 함께 은밀히 모의하여 힘을 모아 싸워서 요동을 회복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펄쩍 뜰만도 하련만 언가리가 흥분을 가라앉히고 물었다.

“모 유격을 변경에 머물러 있도록 청하고, 또 대병을 청하여 잠복시킨 뒤 우리 후금을 공격하려고 하는 태도는 뭐요? 우리의 후방을 교란하여 후금의 허실을 염탐하려 했겠지만, 이 서한을 우리 나졸들이 주워올 줄은 꿈에도 생각은 못했겠지요?”

난감한 일이 펼쳐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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