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박 13일, 360㎞ 민통선을 걷다.
최유정(동화작가)

최유정 동화작가

출간을 앞둔 책의 교정지를 한참 들여다보고 있을 때였다. 전화 한 통을 받았다. 7월27일부터 8월8일까지 진행되는 통일걷기를 같이 하자는 제안이었는데 더불어민주당 현 원내대표인 이인영 국회의원이 2017년부터 계속해 오고 있는 통일행동, 평화행동, 생명행동, 민통선(민간인 통제 구역) 360㎞ 걷기 운동이라고 했다.

사실 불가능한 일이었다. 장장 12박 13일이나 되는 시간을 비울 수가 없었다. 당장 손에 쥐고 있는 원고 수정도 해야 되고 10월 말까지 써주기로 한 원고는 구상만 해두었을 뿐 아직 한 줄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올 안에는 어떻게든 손을 대야 할 원고가 첩첩산중이었다. 그런 지경에 12박 13일이라니! 그것도 360㎞의 고행이라니! 사실, 정말,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설득을 당하고 말았다. 설득을 당한 이유는 고백할 기회가 따로 있겠지만 어쨌든 나는 수락을 했고 간당간당, 마감 시간을 지켜낸 새벽, 배낭을 싸기 시작했다.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라 챙겨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이것저것 짐을 욱여넣을 때마다 배낭은 무거워졌고 걱정도 점점 더해갔다. 괜한 짓을 하고 있단 생각이 자꾸 들었다.

고성, 통일전망대를 시작으로 파주, 임진각에 이르는 360㎞ 걷기는 시작 첫날부터 고행이었다. 물을 뿌린 것처럼 아스팔트 가득 풀어 헤져져 있던 아지랑이! 폭염은 아스팔트까지 녹일 것 같았다. 먼눈으로 봤을 때는 다소 완만해 보였는데 발을 내디딜 때마다 헉헉 소리가 절로 터져 나오던 산등선이! 그 산등성이들은 또 얼마나 끝이 없고 길던지! 다 올랐구나 싶어 고개를 쳐들면 느리고 긴 산등성이가 다시 눈앞에 놓여 있었다. 한없이 산을 휘감고 돌고 돌던 향로봉의 능선은 후기처럼 글을 쓰는 지금도 아찔하게 기억이 나는데 민간인 통제선 북쪽에 있는 동부전선의 요충지인 향로봉에는 한국전쟁 때에 죽은 어린 병사들의 넋이 아직도 골짜기 곳곳 잠들어 있다고 했다.

욱신거리는 물집의 고통, 체감온도 41도를 감내하며 걸어야 하는 폭염의 고통, 당장이라도 땅바닥에 드러눕고 싶은 호흡의 고통을 감내하며 걸어야 해서일까? 왜 자처해서 이 길을 지금 걷고 있는가, 싶은 생각이 자꾸 들었다. 사실 걷는 것 외엔 달리 할 것이 별로 없는 행군이었다. 목적지를 향해 가는 길은 당당 멀었고 자꾸 튀어나오는 우문에 나는 자연스레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그 답을 찾기 위해 360㎞, 민통선 걷기에 나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1953년 휴전이래, 휴전을 종식시키기 위한 숱한 노력들이 있어 왔다. 숱한 만남들이 있고 숱한 제안들이 있었다. 숱한 정책들이 만들어졌으며 숱한 계획과 도전들이 있어왔다. 하지만 노력은 번번이 노력에 그쳤고 남과 북의 만남은 어떤 이유로든 계속 이어지지 못했다. 제안은 거절되기 일쑤였고 정책은 남발될 뿐, 변변한 성과를 도출시키지 못했다. 그 결과 우리는 지도 위, 유일한 분단국가라는 멍에를 아직까지도 걸머메고 있다. 물론 한반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주변국들의 이해관계가 매번 통일 논의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다 보니 통일로 나아가는 길엔 늘 산 넘어 산이 놓여 있고 강 너머 강이 놓여 있었다. 고비를 넘기면 또 다른 고비가 ‘통일’을 가로막기 일쑤였다.

그래서일까? 길고 어려운 과정 때문인지 통일은 늘 멀리 있었다. 모두가 통일을 이야기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통일을 당면의 과제로, 내 자신의 문제로 느끼지 못했다. ‘통일’은 거의 추상명사가 되어가고 있었다. 존재하지만 느껴지지는 않는 것. 느껴지지만 손에 쥐어지지는 않는 것.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머릿속으로만 ‘통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구호처럼 남발하고 있을 뿐 ‘통일’은 늘 내 일상 밖에 있었다.

이번 민통선 360km를 걸으면서 얻은 가장 큰 성과는 통렬한 ‘깨달음’이었다. 나는 너무 아름다워서 다소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민통선 길, 남방한계선 철책 길을 걸으며 그 아름다움 안으로 한 발도 내딛지 못하는 내 조국의 현실에 처음으로 참담함을 느꼈다. 몸무게만큼이나 무거워 보이는 총을 어깨에 걸쳐 메고 남방한계선 철책을 말없이 순찰하고 있는 어린 군인들을 바라보며 끝도 없는 슬픔 역시 느꼈다. 참담함과 슬픔이 뼈에 아로새겨지는 기분이었다.

누가 이토록 아름다운 우리 강산에 철책을 만들어놨는가, 철책을 끊지 못하게 하고 있는가, 나는 어느새 분노하고 있었다. 비로소 통일을 방해하고 반대하는 그 어떤 이유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책 앞에 선 어린 병사가 내 아들로 여겨지는 순간, 나는 난생처음 ‘통일’을 내 문제로 받아들였고 내 어린 아들을 철책 앞에 세워둬서는 안 된다는 다짐까지 하게 됐다. ‘통일’이 내 안으로 쏙 들어오는 기분! 비로소 ‘통일’은 나의 문제이자 내 삶을 결정짓는 문제가 되었다.

민통선 360km를 걸으면서 나는 또한 ‘사람’을 만났다. 물집 뜯어내는 고통을 함께하고 거친 호흡을 위로하고 숨 고르기를 함께 나눴던 사람들! 그 사람들을 통해 나는 ‘감사함’을 또한 배웠다. 사실 우리는 모든 것을 함께 나눌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모든 것을 함께 견뎌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철저히 분리된 공간과 시간 속에서 13일을 견뎌야 했으니 말이다.

13일의 견뎌냄을 통해 다소 지나친 해석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기분을 느꼈다. 부족함을 나누고 아픔을 공유하는 순간, 나는 기뻤다. 타인의 아픔과 부족함에 늘 내가 눈 감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자 옆에 있는 사람이 건네는 말 한마디에도 눈물이 나왔다. 아, 사람이란 원래 이런 존재였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슬픔과 기쁨을 같이 누리고 사는 존재, 부족함과 허기를 함께 나누며 견뎌내는 존재. 사람이란 원래 이런 존재란 생각이 들었다. 12박 13일을 이 사람들과 함께 하며 나는 무척 행복했다.

몇 장의 원고지에 12박 13일의 행군을 다 정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2019년 민통선 걷기’에 관련해 올해 말 쯤, 이인영 국회의원과 공저로 책을 한 권 낼 예정이다. 부디 앞으로 글을 쓰는 과정이 내가 걸었던 과정만큼이나 빼곡하고 충실 되기를 미리 바래 본다. 바램을 담아 2017년 이인영 국회의원이 쓴 책의 프롤로그 한 구절을 남긴다.

‘민통선을 민간인 출입 통제선이 아니라 민족통일로 가는 길이어야 하고 평화와 생태의 선이 되어야 합니다. 민통선을 평화와 생태의 선으로 바꾸고 그다음에 휴전선을 통일의 길로 바꾸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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