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독립운동의 산실 흥학관
청년학생들 애국계몽 교육으로 독립의지 고취
신간회·청년회 등 광주 독립운동단체 본거지 역할
학생독립운동 주역 흥학관 강연듣고 민족의식 깨쳐
정부수립 후 2공화국까지 광주시의회 의사당 활용
항일사적지 지정 불구 표지석 하나 없이 수십년 흘러
존재감 갈수록 ‘희미’…후손 등 기념사업 추진 주목

흥학관은 일제 강점기 광주지역 청년학생들의 독립운동 근거지 역할을 한 역사적 장소다. 왼쪽 원내는 흥학관 부지로 알려진 광주광역시 동구 광산동 100번지 일대. 작은 원은 일명 구시청 사거리. /임문철 기자 35mm@namdonews.com
최상현의 둘째 최정엽의 가족사진. /최기성씨 제공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 최상현의 막내딸 최옥숙 첫째아들 최정숙, 둘째 최정엽 큰며느리 조규희, 부인 전보통, 장손 최윤성, . /최기성씨 제공
광주 구시청 본관. /광주광역시청 제공
광주 구시청 본관. /광주광역시청 제공

흥학관은 일제 강점기 광주 청년학생들의 애국계몽 교육공간이자 독립운동 산실이었다. 그런데 일부 고령자를 제외하곤 흥학관의 존재를 아는 사람들이 드물다. 광주의 3·1운동과 학생독립운동의 근거지로 우리 역사에 중요한 장소임에도 표지석 하나 없이 수십년을 지나면서 기억 속에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1912년 전후 건립

흥학관의 정확한 건립 시기는 밝혀진 바가 없다. 여러 증언과 자료를 토대로 추측해보면 대략 1912년 전후로 추정된다. 흥학관의 시작은 광주 최부자로 알려진 최명구(1860~1924)가 자신의 셋째 아들인 최종수(1894~1940)를 위해 내준 공간이었다. 당시 광주공립보통학교(현 광주서석초등학교)의 동창회장직을 맡고 있던 최종수는 이 공간을 광주독립단체의 본 거처이자 청년문화의 산실로 활용했다.

당시 광주공립보통학교는 광주운동의 원조격 이라 할 수 있다. 청년단체가 전무하던 시기 민족적 감정을 부흥시키며 신문·잡지 발행, 강습회, 토론회, 강연회, 정구·축구·야구 등 체육 장려를 통해 흥학관을 활용했다. 흥학관에는 사립보통학교와 고등과 강습소, 여성야학교 등이 있었고 장학금과 도서, 학용품 등이 제공돼 인재양성의 장이 됐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 왕재일은 흥학관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흥학관 야학에서 공부해 광주고등보통학교(현 광주제일고등학교)에 합격했다고 회고했다. 성진회 회원들을 비롯해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들은 흥학관에서 열린 강연을 듣고 민족의식을 깨쳤고, 애국애족 정신을 길렀다.

흥학관에 대한 가장 오래된 자료는 1914년 발간된 ‘광주읍지’의 ‘학교’ 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는 “흥학관은 서광산정에 있으며 최명구가 청년들을 위해 수양회장으로 세운 것이다”라고 기록됐다. 이후 최명구는 1921년 자신의 회갑을 맞아 잔치를 대신해 그 비용으로 건물을 세웠다. 당시 동아일보에는 1921년 3월 26일 자 4면에 ‘진정한 사회사업자가 나타나다’라는 제목으로 흥학관 낙성식과 관련한 기사가 실렸다. 최명구는 이날 200여 평의 부지에 새 건물을 지어 광주민 300여 명을 초대해 낙성식을 거행했다. 1924년 최명구가 세상을 떠나자 장남 최상현(1881~1945)이 1942년까지 이곳을 운영했다.

최상현은 일제 말, 흥학관의 건물과 부지를 광주시에 기부했고, 해방 전까지 광주식량배급조합 사무실로 사용됐다. 정부 수립 후부터 제2공화국 때까지는 광주시의회의 의사당으로도 쓰였다. 그러나 1960년대 광주시청이 광산동에서 계림동으로 옮기면서 건물이 철거돼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초등학교를 연상시킬 만큼 넓은 대지는 현재 10여 개로 쪼개져 상업건물이 들어서 있다.

◇최명구 기부로 흥학관 지어져

흥학관을 세운 최명구는 광주 일대의 대지주였다. 당시 광주 구시청 일원이었던 광산구 일대를 비롯해 지금의 동구와 남구, 광산구에 많은 토지를 소유했다. 최명구는 공익사업이라면 두말없이 땅을 내놓았는데 이 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흥학관이다. 200여 평 규모의 흥학관은 일본식 단층 목조건물이다. 2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강당과 소규모 강의실, 여러 개의 온돌방 등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온돌방에서 숙식하며 배움을 이어가는 청년들도 있었다고 한다. 최명구는 당시 1921년 새롭게 건물을 건립할 당시 1만 원의 거금을 흔쾌히 내놓아 널리 쓰일 수 있도록 했다.

최명구의 장남인 최상현도 독립운동을 돕고 빈민구제에 물심양면으로 힘쓴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인재양성에 힘썼던 그는 손창식을 일본 동경으로 유학을 보내주기도 했다. 또한 양림동에 저택(최승효 가옥)을 지어 독립운동가들을 숨겨주곤 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그는 일본의 모욕적이고 계속되는 핍박에 한쪽 귀를 닫겠다는 뜻으로 호를 일농(一聾)이라 지었다. 그럼에도 흥학관을 근거지로 한 광주 청년학생들의 민족계몽운동은 계속됐고, 이에 일본은 1944년 최상현의 둘째 아들 최정엽(1923~1994)을 학도병으로 끌고 가기도 했다.

◇흥학관 자리 찾기 의미

흥학관은 1942년 4월 일제에 의해 동일은행에 강제 합병된 민족계 거대 은행 호남은행과 함께 광주에서 가장 오랫동안 조선인들에 의해 운영된 기관이다. 하지만 흥학관은 광주시청 이전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흥학관이 있었던 광주 동구 광산동 100번지가 국가보훈처에 의해 국내 항일운동사적지로 지정돼 그 위치만 짐작게 할 뿐이다.

최근 최명구-최상현 부자의 후손을 중심으로 기념사업 움직임이 전개되고 있다. 최상현의 손자인 최기성씨는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잘못된 정보를 바로잡기 위해 힘쓰고 있다. 흥학관이 있던 자리에 표지석이라도 세워 ‘광주 청년학생들의 독립운동 산실’임을 알렸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양림동 역사 연구자 등 일부 인사들도 최씨와 공동 보조를 하고 있다. 조만간 흥학관 기념사업 관련 단체도 결성해 행보를 본격화할 것으로 알려졌다. 최씨와 일부 인사들은 양림동 최승효 가옥을 활용한 흥학관 복원 및 기념사업도 조심스레 고려하고 있다.

최상현 가옥은 최상현의 둘째 아들 최정엽이 물려받아 1970년대 후반까지 거주했다. 이 건물은 800평의 부지 위에 정면 8칸, 측면 4칸의 매우 큰 규모의 전통가옥이다. 일자형 평면의 팔작지붕이면서도 우측의 경사진 부지를 자연 그대로 이용해 1퇴(退)공간의 반지하층을 구성하고 있다. 좌측으로도 1퇴를 개방, 공간으로 주어 비대칭의 평면과 입면을 형성해 단조롭지 않게 했다. 독립역사로서뿐만 아니라 한말 전통가옥의 이행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건축사적으로도 의의가 큰 구조물이다.

그러나 최정엽이 1977년 사업을 하는 지인을 돕고자 은행 담보로 보증을 서주었던 일로 최승효에게 매매했다. 이에 최승현 가옥은 오늘날 최승효 고택으로 ‘양림동 최부잣집’이라 불리고 있다. 최승효 고택은 광주광역시 민속문화재 2호로 지정돼 있다. 현재 최상현의 가옥 중 최씨 일가의 소유로 남아있는 곳은 광주 남구 사동의 한옥이 유일하다. 사동 한옥은 1942년 최상현이 큰아들 최정숙을 위해 지은 집인데 현재 최정숙의 장녀 최순 여사가 거주하고 있다.
/한아리 기자 har@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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