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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제4부 풍운의 길 1장 인조반정<401>

“서인 일파인 김류·이귀·이괄이 임금의 조카인 능양군과 함께 정변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이서·신경진·구굉·구인후도 가담했고요.”

“그게 사실이렸다?“

“그렇습니다.”

정충신은 딱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몰랐다. 모두가 임금을 따르는 충신들 아닌가. 등잔밑이 어둡다더니 과연 그렇구나. 한 주머니에 두 주머니를 달았구나.

“이괄도 참여했다고?”

“그렇습니다. 김류·이괄·이귀·최명길·장유·심기원·김자점 등이 모의에 참여하여 반정을 성공시켰다고 합니다. 집권세력인 대북파의 이이첨·정인홍 등 수십 명이 처형되고, 200여 명이 체포되었다고 합니다.”

“이괄·최명길이 참여했다 이 말이지?”

그는 거듭 물었으나 똑같은 대답이 나왔다. 정충신이 뭔가 아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으나 사태가 이렇게까지 나갈 줄은 몰랐다. 이괄이 불만을 터뜨리더니 기어이 일을 저질렀군. 그러나 정충신은 도열한 군사를 향해 호령했다.

“군사들은 한치의 흐트러짐없이 군무에 충실하라. 이 시각 이후 비상 갑호를 발령한다.”

중앙 정치가 어떻게 되든 군인은 군인의 길인 국경을 굳건히 지켜야 한다. 그는 병영을 단단히 해놓고, 후금 지역으로 말을 달렸다. 후금에 우호적인 광해가 쫓겨났다면 그들이 가만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마침 다이샨 패륵이 진영에 있었다. 그는 정충신을 반겼다.

“좌우후로 승진해 변경을 지킨다고 했소? 거 참 잘 되었소이다. 우리와 친분이 두텁고 교류가 있는 장수가 변경에 있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지. 오해가 생기면 서로 대화를 통해 해결할 수 있으니 다른 누구보다 정 장수가 의주땅 병마좌우후가 된 것을 환영하오.”

“그런데 다이샨 패륵, 우리나라에 정변이 일어났습니다. 상이 쫓겨났습니다.”

“아니, 광해 임금이 쫓겨났다고? 그렇다면 필시 명나라를 따르는 자들이 엎었겠구만?”

다이샨 패륵이 단박에 짚었다. 조선국이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광해와 장만, 정충신이 후금과의 관계를 돈독히 해야 한다는 친금파(親金派)이고, 최명길이 비교적 우호적인 반면에 중신 대부분 친명 사대에 목숨걸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장만은 병조판서에서 물러났고, 정충신은 북방 변경에 와있다. 중앙무대에서 최명길 외 극히 제한된 인력만이 친금세를 유지하고 있으니 거대한 중신들의 벽을 뚫을 수 없을 것이다. 앞으로의 정책은 보나마나다. 후금에게는 치명상이다. 명을 치러 나가는데 뒤에서 뒤통수를 때리는 자가 나타났으니 불안할 수밖에 없다.

“사태를 알아주시오. 우리도 조선국의 일에 가만 있을 수 없소.”

“알려주겠소. 다만 나와 다이샨 패륵과의 우정에 변함이 없으니 국경선에도 이상이 없어야 하오. 후금의 군대들이 강을 건너지 않도록 유념해주시오. 이런 때 국경선까지 혼란스러우면 서로 복잡해집니다.”

“알겠소. 어서 진영으로 돌아가시오.”

정충신은 의주 진영으로 돌아왔다. 직접 한양에 나서서 동태를 살피려 했으나 이런 때일수록 변경을 벗어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전령을 한양으로 보냈다. 한양에 다녀온 전령이 전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한국학 중앙연구원 등이 기록한 <인조반정> 인용).

-1623년(광해군 15) 이귀 등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집권당인 이이첨 등의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 종(倧:후에 인조)을 왕으로 옹립한 정변이다. 광해군은 즉위 직후 정세 변화에 따라 왕위를 위협할지도 모를 동복형 임해군과 유일한 적통 영창대군을 죽였다. 이어 칠서지옥(七庶之獄:서얼 출신 7인이 은상인을 살해한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옥사)을 일으키고, 이를 계기로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인목대비 아버지)인 김제남을 죽이고, 영창대군을 강화에 유폐했다.

영창대군을 처형하라는 이이첨의 뜻을 전달받은 강화부사 정항이 8세의 어린 영창대군을 살해했다. 또 정원군(인조의 아버지)의 아들 능창군 전佺:인조의 아우)을 교동에 가두었다가 살해했다.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대비 김씨도 존호(尊號)를 폐하여 서궁이라 칭하고, 조알(朝謁:왕을 알현)을 중지시켰다. 이같은 광해군의 폐모살제(廢母殺弟: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살해함) 사건은 지금까지 대북파에게 눌려있던 서인 일파에게 반동 투쟁의 구실을 주었다. 광해가 명나라를 배척하고 후금을 따르니 부모국을 배신한 죄목도 컸다.

그러나 광해군은 임진왜란 이후 혼란스러웠던 나라를 수습하기 위해 궁궐을 다시 세워 국가기강을 바로잡았고, 대동법과 호패법을 시행해 민생해결에 앞장섰다. 대외적으로는 중립정책을 펼쳐 후금과의 관계를 강화함으로써 전쟁에 휘말리는 위험을 극복했다. 등거리 평화정책은 날로 세력을 키워 중국을 통일한 후금과의 관계를 안정시킨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그런데 이것이 산산조각이 날 형편에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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