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광우 작가의 광주의 의인들
(5)한말 의병과 忠心 함께 한 여창현
‘빼앗긴 나라를 되찾자’ 행동한 초야의 선비
아들 독립운동 참여 시키고 의병장 손녀 며느리 맞아
‘운사유고’ 문집에 나라잃은 망국의 고뇌·탄식 담겨
장성 수연산 봉기 기삼연 등 호남의병 주역들도 기록
기삼연 처형에 광주사람들 불도 때지 않고 함께 울어
전국 의병 60%가 호남 의병…역사교과서 다시 써야

여창현 사진. 곡성 출신인 그는 호남 유림의 거두 노사 기정진의 마지막 제자로 한말 호남 의병장 기우만의 손녀를 며느리로 맞이해 평생을 한 집에서 살면서 ‘빼앗긴 나를 되찾자’는 의병들의 충심(忠心)과 함께 하고자 했다.

광주가 의향인가?

지금은 폐가가 되어버린 곳이 광주 신역이다. 1968년경 이곳에 기차가 달리기 시작했고, 한때 서울을 오르내리는 열차가 이곳에다 광주 사람들을 많이도 퍼 나른 적이 있었다. 그 무렵 나는 신역 입구에서 ‘의향 광주’를 새긴 조형물을 보았다. 나는 그 말의 뜻을 몰랐다.

‘의향 광주’라는 호칭이 나에겐 낯설었다. 한때 서울 사람들이 광주를 ‘민주 성지’라고 부른 적이 이었다. 그 일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1929년 광주 학생들이 항일 투쟁의 선구에 나섰다. 그 일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나는 고교 시절 박정희를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한 적이 있다. 교도소를 들락거리기도 하였다. 오랫동안 감옥과 수배의 꼬리표를 달며 살았던 내가 정작 ‘의향 광주’를 설명할 수 없었다. 광주에서 태어났고, 광주에서 자랐으며. 광주의 아이들을 꽤나 많이 가르쳐 온 내가 정녕 ‘의향 광주’를 설명할 수 없었다.

조선은 문집(文集)의 나라다. 선비들은 죽어서 한 권의 문집을 남겼다. 생시에 작성한 시와 편지를 묶어 그의 자식과 제자들이 한 권의 책으로 편집했다. 500년 조선 역사에서 사서오경을 암송하고 글을 남긴 이가 수십 만 여명에 이를 것이니, 조선은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할 수 없는, 글의 나라요 문집의 나라였다.

선비의 문집을 한글로 옮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문장을 구분하는 마침표도 없고, 띄어쓰기도 없으니 전문가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작업이다. 고등학교 다니면서 겨우 한자 1800자를 배웠다. 이런 실력으로 한문 문집을 풀이하겠다고 덤벼든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때론 무모한 시도가 역사를 진전시킬 때도 있다고 한다. <운사유고>를 풀이하겠다고 덤벼든 나의 무모한 도전은 망외의 깨달음을 안겨 주었다.

<운사유고>의 작가는 여창현 씨이다. 1897년 옥과에서 태어나 1975년 옥과에서 타계한 옥과의 선비이다. 운사 여창현은 큰아들 여운영에게 한 통의 편지를 써주고선 독립 운동가 여운형 선생을 보좌할 것을 명하기도 하였다.

무척 힘들었다. 선비의 문자 세계는 우리와 완전히 달랐다. 그렇게 난해한 것을 5년 동안이나 붙들고 있었던 것은 아침이면 <운사유고>가 나를 불러주었기 때문이다. 흥미가 쏠쏠하였다. 문집을 풀이하면서 나는 몰랐던 선조의 고뇌를 마주하게 되었고, 그들의 탄식을 들을 수 있었다. 게다가 나는 지금껏 몰랐던 한말 호남 의병 운동의 주역들을 만날 수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단발령이 나고 방방곡곡이 아우성이었다. 1896년 광주 향교에서 결집한 호남 의병의 선두엔 송사 기우만이 서 있었다. 그는 노사 기정진의 손자였고, 호남 유림의 거두였다. “내 목을 자를 수는 있어도 내 머리는 자를 수 없다.”면서 거의하였다. 운사 여창현은 송사 기우만의 마지막 제자였다. 송사가 배출한 제자가 무려 1230여명이란다. 칼을 들던 붓을 잡던, 송사의 제자들은 이후 항일 운동의 저류를 형성하였을 것이다.

1907년 헤이그에 특사를 보낸 죄로 고종이 퇴위를 당했고, 이어 군대가 해산되었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의병의 결단을 내리기도 쉽지 않았지만, 의병을 조직하는 일은 매우 힘들었다. 총기와 탄약과 실탄을 조달하는 일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 일을 해 낸 초야의 선비가 있었다. 성재 기삼연이었다.

1907년 호남창의 회맹소를 창건하고 성재 기삼연은 한말 호남 의병의 맹주가 되었다. 10월 30일, 장성의 수연산에선 수백 여 명의 의병들이 깃발을 들고 결의를 하였다. “빼앗긴 나라를 찾자.” 기삼연은 발에 부상을 입었다. 걸을 수가 없어 엉금엉금 기었다. 순창에서 체포되었고, 1908년 2월 1일 광주 공원 앞 백사장에서 총살되었다. 광주 사람들은 기삼연의 처형 소식을 듣고 방에 불을 피우지 않고, 함께 울었다고 한다.

이 장면을 보고 ‘의향 광주’의 의문이 풀리기 시작했다. 운사 여창현은 성재 기삼연의 손녀를 자기의 며느리로 맞이하였다. 큰 아들 여운영의 아내로 맞아들인 것이다. 동학 운동으로 돌아가신 분들, 의병 운동으로 돌아가신 분들의 자녀들이 일제 치하에서 이후 어떻게 살았는지, 나는 조금 안다. 그들은 평생 하늘을 쳐다보지 않았다. 동네 사랑방조차 출입하지 않았다. 대역죄인의 취급을 받으면서 살아야 했다. 그래서 나는 좀 안다. 성재 기삼연의 손녀딸을 맞이한 운사 여창현의 진심을...운사 여창현은 성재 기삼연처럼 용맹하지 못했다. 공부하는 선비였다. 하지만 평생 기삼연의 손녀와 함께 한 집에서 살았다. 운사 여창현의 충심(忠心)을 나는 배반할 수 없었다.

내가 ‘의향 광주’에 의구심을 품었던 것은 ‘한말 호남 의병’에 대한 오도된 인식 때문이었다. 고교 시절 배웠던 역사교과서에 문제가 있었다. 내가 배웠던 교과서에 의하면 한말 의병의 거두는 최익현과 유인석이었다. 송사 기우만도 성재 기삼연도 교과서엔 없었다.

나는 도서관에 가서 의병 사료를 뒤적였다. 1909년 전국 의병 숫자에서 호남 의병이 점하는 비중은 60.1%였다. 이게 뭐여? 일제는 1909년 ‘남한 폭도 대토벌 작전’을 전개하였다고 우리는 배웠다. ‘남한 폭도 대토벌 작전’은 호남 의병을 초토화하기 작전이었다. 그 결과 의병장 전해산이 잡혔다. 의병장 양진여가 잡혔다. 의병장 심남일이 잡혔다. 의병장 안규홍이 잡혔다.

그렇다면 교과서는 다시 쓰여야 한다. ‘남한폭도 대토벌 작전’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실상 ‘호남 폭도 대토벌 작전’이었다. 전기 의병의 지도자가 최익현과 유인석이었다면, 후기 의병의 지도자는 기삼연과 김 준, 전해산과 양진여, 심남일과 안규홍, 모두 호남 의병장들이었다. 이들의 이름이 빠진 교과서는 다시 쓰여야 한다.

/ (사) 인문연구원 동고송 상임이사(2019년 8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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