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제4부 풍운의 길 1장 인조반정<404>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도망갈 때, 신하들의 간곡한 요청으로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고, 그가 나라의 반을 맡았다(분조). 광해의 형 임해군이 법통을 이을 0순위였으나 궁녀를 죽이는 등 행실이 나쁜데 반하여, 광해군은 학문이 특출하고 행실이 발라 세자로 천거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명나라로부터 후궁 소생의 서자라는 이유로 결격사유가 있다고 왕의 후계자 자격을 걸고 나오자 한동안 고생했다.

뒤늦게 세자로 인정받은 광해는 전국을 돌며 군대와 군량을 모아 전쟁을 수행해나갔다. 아비 선조는 여차하면 명나라로 튀려고 했지만, 그는 국내 치안을 안정시키고, 전선의 병사들을 독려했던 것이다. 이런 그를 백성들이 우러르고 따르고, 그를 부인했던 명나라도 애비보다 낫다는 평가를 내렸다. 그러자 선조는 시기한 나머지 그를 몹시 괴롭혔다. 툭하면 세자 책봉을 거둬들이겠다고 위협해 광해는 불안정서가 체질이 되어버렸다.

선조가 죽고 왕위를 물려받은 광해는 가차없이 정적을 제거해 나갔다. 왕권의 불안을 없애려면 가장 큰 위협의 대상인 혈육부터 손을 보아야 했다. 형을 죽이고 동생도 죽이는 ‘패륜’을 저질렀다. 내치의 여러 가지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런 ‘폐모살제’로 말년에는 모든 실적이 부정되었다.

그의 외치는 난세를 이겨나가는 지혜로운 선택이었다. 명과 후금 사이에서 이 풀도 뜯어먹고, 저 풀도 뜯어먹는 균형외교?실리외교는 대국 사이에 낀 조선이 헤쳐나갈 진로였다. 실제로 이 외교정책은 전쟁의 불안을 잠재우는 큰 힘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사대부는 관행적으로 이어져온 기계적인 사대 친명(親明)에 기대 그의 외교정책을 부정했다. 명을 벗어나면 당장 나라가 거덜나는 것으로 아는 구세력은 일찍이 후금의 판세를 읽고 장만?정충신을 차례로 사신단을 꾸려 후금으로 보내 국경선을 안정시키고 침략에 대비한 것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대국을 거역하는 태도는 왕이라도 버텨내기 힘들었다. 대국을 기대 저항하는 세력을 견제하기란 사실상 그에게 지렛대가 없는 것이다. 부모국을 거역하는 대역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힐 뿐이었다.

광해의 친금 외교는 지지기반이었던 대북파(정인홍 이이첨)로부터도 거부당했다. 이익 때문에 나뉘었을 뿐, 그들도 구세력인 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대외정책을 둘러싸고 이렇게 집권파인 대북파와의 공조마저 깨지자 그의 힘은 극도로 약화되었고, 훈련도감의 수장까지 반정군에 가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실리 위주의 대외정책과 내치에서의 상당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광해는 결국 붕당의 갈등을 조절하고 이끄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관계로 비참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그중 동방예의지국의 기본 도리인 어미를 폐서인으로 삼으니 불효막심한 패륜이 되었다. 비록 계모지만 어미는 어미인 것이다.

정권이 무너지자 아니나 다를까 맨먼저 발분한 사람이 폐서인당한 인목대비였다.

“저 독사 같은 인간을 당장 목을 쳐라!”

그러나 이를 반대하고 나선 사람이 영의정을 네 번 역임한 이원익이었다. 그는 영의정 재임시절 광해군이 난폭해지자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대비에 대한 효도, 형제간의 우애, 국가 재정의 검약 등을 간언하고, 임해군의 처형에 극력 반대하다 실현되지 못하자 병을 이유로 고향으로 내려간 사람이었다.

“죽이는 일은 안되옵니다.”

“뭐라고? 저 자를 죽이지 않으면 어떻게 국가기강이 선단 말이오?”

폐서인이 되었던 인목대비는 복수심에 떨었다.

“마마, 광해군을 죽여서 국가기상이 서는 것이 아닙니다. 선정으로 복수해야지요. 광해를 친다면 저 자신도 광해의 밑에서 영의정을 지냈으니 저 역시 마땅히 죽어야 합니다. 그는 가족에게 참으로 얼음과 같은 사람이었으나, 압록강의 얼음을 녹여 외교를 틈으로써 국가의 안정을 꾀한 업적이 더 크옵니다.”

과시할 줄 모르고 성정 또한 어진 이원익의 간청에 따라 광해는 죽음을 면하고 제주-강화도 유배생활을 했다. 대신 그의 아내, 아들 둘과 며느리들이 모조리 죽음을 당했다. 대북파의 영수 정인홍과 이이첨을 비롯해 유희분 유몽인 이위경 등 수십 명이 참수되고, 추종자 200여 명 또한 처형되거나 유배되었다.

반정에 공을 세운 이귀 김류 김자점 이서 심기원 신경진 이괄 최명길 이흥립 심명세 구굉 이시백 등 33명은 세 부류로 나누어 정사공신(靖社功臣)의 공훈을 받고 권좌의 요직을 차지했다. 그러나 논공행상이 공평하지 못하다 해서 들고 일어난 사람이 있었다.

“아니, 기회주의자가 일등공신이 되는 법이 있나? 반정 당시 집에서 벌벌 떨다가 판이 유리하게 돌아가니까 뒤늦게 등장한 사람이 1등공신이 되고, 죽음을 무릅쓰고 앞장서서 군대를 지휘했던 사람이 2등공신이 되는 공훈법이 있냐고! 이런 개족같은 대접받으려고 칼에 피를 묻혔단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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