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룡강성 밀산시에 자리한 ‘서일 총재 항일투쟁 유적지’

항일독립운동가의 발자취를 따라서
<2>청산리 전투의 실질적 지도자…백포 서일 총재
흑룡강성 밀산시에 자리한 ‘서일 총재 항일투쟁 유적지’
나철 선생 영향받아 대종교 귀의…독립운동가 양성
만주 최초 무장독립운동 단체 ‘중광단(重光團)’ 조직
대한독립군단 초대 총재…항일투쟁사에 빛나는 족적
 

중국 흑룡강성 밀산시의 한 산 초입에는 ‘서일 총재 항일투쟁 유적지’가 자리잡고 있다. 이 유적지 기념비에는 대종교 3대 도사교였던 서일 선생의 독립운동 활약상이 새겨져 있다. /김영창 기자 seo@namdonews.com

1910년 8월 29일은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국권을 상실한 치욕의 날이다. 즉 일제가 대한제국에게 ‘통치권을 일본에 양여함’을 규정한 한일병합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게 한 날이다. 당시 이를 지켜본 조선의 한 젊은이는 무작정 독립운동에 뛰어든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시작한 그 젊은이는 후에 일본군이 가장 무서워하던 독립운동가로 이름을 떨치며 수많은 독립군을 배출시킨다.
 

특히 일제강점기 시절 대한독립군이 일본에 가장 큰 타격을 입힌 전투인 청산리 전투에서 실질적 지도자로 나서 승리를 이끈다. 일제를 깨부술 수 있는 것은 힘뿐이라고 믿었던 젊은 혁명가, 그 힘은 강고한 정신력과 무장을 바탕으로 난다고 생각한 서일 총재다.

◇청산리 전투의 실질적 지도자
 

서일 총재 항일투쟁 유적비 뒷면에는 한글과 한문으로 각각 서일 선생의 독립운동 당시 활약상이 새겨져 있다. /김영창 기자 seo@namdonews.com

중국 흑룡강성 밀산시에는 서일 선생의 독립운동의 삶과 조국애를 느껴볼 수 있는 ‘서일 총재 항일투쟁 유적지’가 자리잡고 있었다. 유적지는 청산리 대첩으로 일본군에 큰 타격을 입힌 선생의 활약상과 위대한 삶을 기리기 위해서 2015년 8월 15일에 조성됐다. 산 초입에 자리잡고 있는 유적지 안내비석은 높이 1m, 너비 3m정도 크기로 길가에서도 한눈에 보였다. 차에서 내려 유적지까지는 약 80m로 누구나 걸어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다. 유적비 앞면에는 한글과 함께 한문으로 ‘서일 총재 항일투쟁 유적지’라고 쓰여 있다.

뒷면에는 “서일, 도호는 백포이며 1881년 2월 26일 조선에서 출생, 1911년 3월 중국 길림 왕청 덕원리로 망명했다. 서일은 항일‘무장투쟁론’을 주장한 대표적 인물이며 중광단, 대한정의단,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단의 주요 지도자이다. 1920년 10월. 서일은 연변지구에서 항일련합부대를 지위하여 저명한 청산리대첩을 펼쳐 일본침략군 수천명을 섬멸함으로서 일본군의 ‘천하무적’ 신화를 깨뜨리고 동북항일투쟁사에 빛나는 한페이지를 남겼다. 동년 12월, 서일은 북로군정서를 거느리고 전략적 전이를 하여 밀산 평양진에서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총재를 담임하였는 바 총병력은 3천500여명에 달했다. 1921년 6월, ‘자유시사변’ 후 서일은 당벽진에 주둔하여 ‘둔병제’를 실시하면서 항일무자투쟁을 견지하였다. 8월 17일 밤, 부대는 비적들의 불의습격을 받아 침중한 손실을 보았다. 극도의 심신타격을 받은 서일은 8월 26일 당벽진 뒤산에서 순직하였다. 향년 41세였다”라고 새겨져 있다.
 

‘서일 총재 항일투쟁 유적지’를 방문한 광복회 광주·전남지부 회원들이 기념비 앞에서 추모를 하고 있다. /김영창 기자 seo@namdonews.com

이처럼 유적지에는 일제 강점기 시절 서일 총재의 일대기가 담겨 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한평생 목숨 바친 그는 결국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유적비에 쓰여진 글로나마 조국에 대한 사랑과 연민을 느낄 수 있었다.

◇대한독립군단 초대 총재…씁쓸한 그의 죽음
 

서일 총재.

유적비에 써져 있는 것처럼 백포(白圃) 서일(徐一, 1881~1921)은 함경북도 경원군 안농면 금희동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25세에 을사늑약, 30세에 경술국치를 겪었다. 이에 서일은 1911년 국내에서의 항일투쟁의 어려움과 조국의 암담한 현실에 울분을 터뜨리며 만주 왕청현으로 떠났다. 이는 만주에서의 항일무장투쟁 10년의 시작이었다. 이듬해 그는 홍암 나철 선생의 영향을 받아 대종교에 귀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서일은 만주 최초의 무장독립운동 단체인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했다. 단장에 취임한 그는 무력항쟁의 기틀을 잡고자 체제구축에 심혈을 기울이는 한편 대종교의 이념계승에도 몰두했다. 그는 대종교 입교 후 포교에도 나서 3년 동안 동만주 북만주 연해주 함경도 일대에서 10만여 명의 교우를 모았다. 젊은 청년들은 독립군으로 편입시키고 일반 교우들에게는 군량조달 등 다른 직무를 부여했다.

당시 서일은 중광단을 통해 대일무장투쟁을 추구했으나 재정 문제 등 조직적 체제가 구축되지 않아 실질적 군사투쟁은 전개하지 못했다. 이에 수많은 독립군 및 운동단체 집결을 위해 1918년 김좌진, 김동삼, 신채호 등 39인 연서로 무오대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

이듬해 1919년 7월부터 청산리전투가 전개된 1920년 10월까지 중광단을 확대개편한 대한정의단, 대한군정부, 북로군정서 등 독립군단을 이끌었다.

이후 청산리 전투에서 대승을 이끈 서일은 여러 독립군단들이 통합된 대한독립군단에서 총재로 추대됐다. 부대편성을 마친 독립군단은 1921년 초 우수리 강을 건너 시베리아로 이동했다. 하지만 소련 영토 안에서 일본에 대적하는 독립군을 육성하면 양국 간 우호관계에 큰 지장을 초래할 것이라는 일본의 위협에 소련이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강요하는 ‘자유시참변’으로 독립군은 큰 타격을 입는다. 당시 수많은 동포와 청년독립군들이 희생을 당했다. 이에 비분강개한 서일 총재는 1921년 9월 28일 마을 뒷산 산림속에서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41세에 생을 마감한 서일 선생의 유언은 “조국광복을 위해 생사를 함께 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을 모두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살아서 조국과 동포를 대하리오. 차라리 이 목숨을 버려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리라”라고 알려졌다. 한편 현재 정부는 서일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한평생 목숨을 바친 서일 선생의 유적지를 뒤로한 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가 벌어진 곳으로 달려가 그 뒷이야기를 취재했다.
/김영창 기자 seo@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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