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공간, 숨을 불어넣다 (상)
폐교가 ‘읽고, 하고, 쓰고, 펴내는’ 문화공간으로
고창 책마을 해리…책감옥 영화제 등 프로그램 다채
전주 팔복예술공장은 폐공장 활용…도심속 명소 변신

책마을 해리 전경
책마을 해리의 책뜰

폐교, 창고, 상업시설 등 인구감소로 없어지거나 버려진 지역 유휴시설이 해마다 늘어나면서 이를 낙후된 도심을 재활시키는 수단으로 활용한 사례가 주목을 받고 있다. 철거가 아닌 보존과 활용의 방식으로 잊혔던 공간을 지역의 주요 문화거점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8월 28일부터 30일까지 한국언론진흥재단 광주지사가 주관한 ‘오래된 공간, 지역 명소로 귀환하다’ 연수프로그램에 참가했다. 광주와 전북, 창원 부산 등의 현장을 방문해 살펴본 우수 사례와 운영 방향에 대해 두 차례 소개하고자 한다.

◇고창 책마을 해리
 

온방 가득 책으로 둘러싼, 책숲시간의 숲에서 이대건 촌장이 강의를 하고 있다. /한아리 기자 har@namdonews.com

2006년 도축장이 될 뻔한 폐교는 책과 읽고 스스로 저자가 되는 ‘책마을’로 변모했다. 1939년 개교한 나성초등학교는 900명의 학생이 다닐정도로 규모가 있었다. 하지만 저출산과 탈농촌의 가속화로 2001년도 폐교됐다. 이대건 책마을 해리 촌장은 2006년 폐교를 사들여 2012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운영에 돌입했다. 현재는 버들눈 도서관, 누리책공방, 온누리책창고, 나성사진관, 종이숲, 책마을 갤러리 등을 갖춘 책 중심의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과거 학교의 외관은 그대로 보존했다. 학교 혹은 스쿨의 이름을 갖고 있는 대부분의 프로그램이 그 자체로 공간의 정체성을 나타낸다. 시인학교, 편집디자인스쿨, 진로학교, 삶글학교, 마을학교, 출판캠프 등 방문한 이로 하여금 ‘읽고, 하고, 쓰고, 펴내는’ 공간이다.
 

온방 가득 책으로 둘러싼, 책숲시간의 숲.

기증받은 17만여 권의 책은 폐교 곳곳에 자리한다. 교실 2개를 합쳐 만든 ‘책숲시간의 숲’에는 3만여 권의 책이 마주 보는 양쪽 벽을 메우고 있고, 책장에는 그동안 출판된 도서가 전시돼 있다. 또한 관사로 쓰였던 공간은 숙박공간으로 리모델링 돼 여행객을 받고 있으며, 출판캠프를 비롯해 한지공방, 활자 공방 같은 체험도 가능하다.

건물 뒤편 큰 나무를 양쪽에 끼고 있는 바람 언덕에서는 수시로 작은 공연이 열리고, 매년 10월 3일 동안 전 세계 10개국의 영화를 만날 수 있는 ‘책마을 영화제’도 이곳의 자랑이다.
 

책감옥
책감옥 내부

아이들이 가장 사랑하는 공간은 스스로 갇히는 ‘책감옥’이다. 이곳에 들어가면 책 한권을 다 읽기 전까지는 나올 수 없다. 문은 밖에서 걸어 잠글 수 있고, 사식을 넣어주는 구멍까지 만들어져 있어 그야말로 감옥의 형태에 재미를 더한 공간이다.

출판브랜드인 ‘책마을해리’ ‘도서출판기역’ ‘나무늘보’를 통해 동네 할머니부터 어린이, 교사, 주부 등이 작가가 됐다. 현재까지 마을 학교를 통해 출판된 책은 100여권에 달한다.

무엇보다 책 마을 해리의 가치는 자생한다는 점이다. 다양한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며 기록하고 출판하는 생태계를 일구고 있다. 출판을 통한 수익금과 북 스테이, 캠프를 통해 책 마을 해리는 운영되고 있다.
 

팔복예술공장 전경

◇전주 팔복예술공장

정부주도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수립되며 전라북도는 전주를 중심으로 산업발전을 이뤘다. 1967년 전주공업 단지 기공식 후 1969년 본격적인 공장 입주가 시작되며 팔복동 전주 공단이 구성됐다. 이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쇠퇴과정을 겪어 왔다.

팔복예술공장의 전신은 ‘썬전자(현 쏘렉스)’라는 카세트테이프 공장이다. CD 시장의 성장과 함께 1989년 폐업한 공장은 산업단지 속에서 사람들 기억 속에 잊힌 채 25년을 머물렀다.

전주시는 폐 산업시설 문화 재생사업의 일환으로 팔복예술공장을 조성했다. 예술가의 재도약과 창작활동을 지원하고, 시민을 위한 복합문화시설을 구축했다.

지난 2018년 3월 세 동 가운데 A동을 중심으로 문을 열었다. B동은 교육센터, C동은 다목적 공간을 목적으로 공사를 진행중이다.

2층으로 구성된 A동은 작업실과 전시장으로 구성된 창작공간을 비롯해 교육·전시공간 등을 갖추고 있다. 공장건축을 느낄 수 있는 외벽과 지붕, 바닥, 철문 등 기존 재료를 활용해 공장과 예술 두 가지 면을 어우러진다.
 

컨테이너 브릿지

A동과 B동을 잇는 거대한 붉은색 컨테이너 브릿지는 방문객이 쉬어갈 수 있는 만화책방과 한쪽 벽면 전체를 유리로 장식해 커다란 스케치북의 형태를 띠고 있다. 로비로 들어서면 현대적인 조형물과 전시된 작품이 이곳이 공장이었음을 느낄수 있게 하는 오래된 기둥, 깨진 벽과 함께 조화를 이루고 있다. 마을 주민이 커피를 내리는 카페 ‘써니’를 지나쳐 2층에 올라서면 전시공간이 펼쳐진다. 창작공간에 입주한 10명의 작가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유진숙 작 하루

가장 눈길을 사로잡는 작품은 당시 공장에 근무했던 노동자의 삶을 그대로 바로 볼 수 있는 유진숙 작가의 ‘하루’다. 당시 400여 명에 달했던 여직원들이 사용했던 네 칸짜리 화장실을 그대로 활용했다. 화장실 옆 벽에는 ‘예쁘게 빛나던 불빛, 공장의 불빛~’으로 시작하는 가수 김민기의 ‘공장의 불빛’ 노랫말이 적혀있다.
 

엄혁용 작 책, 자연, 나무-책으로부터
옥상에서 바라본 전경.

전시는 옥상에서도 이어진다. 낡고 부서진 철거를 하다만 듯한 구조물, 그안에도 작품이 자리한다. 29일까지 진행되는 옥상展은 ‘수직의 안팎에서’를 주제로 입주작가 박진영, 안준영, 김영란, 최은숙, 엄혁용 등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어울리지 않는 공간과 작품은 미묘한 이질감을 주기도 한다. 옥상을 가로질러 건물 끝 난간에 서면 철길과 금학천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한아리 기자 har@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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