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격살 ‘청산리 대첩’ 민족 자주독립 역량 입증

항일독립운동가의 발자취를 따라서
<5>‘대한독립군의 전설’ 백야 김좌진 장군
일본군 격살 ‘청산리 대첩’ 민족 자주독립 역량 입증
어린시절 부호 영화 팽개치고 독립운동 뛰어들어
연길~백두산 길목 ‘어랑촌’ 주둔하며 대승 이끌어
한족연합회 결성 황무지개간·문화계몽사업 ‘앞장’
 

충남 홍성에 있는 김좌진 장군 기념관과 생가 터.

대한독립운동가 하면 누구나 떠올리는 이름 ‘백야 김좌진’ 장군. 일찍이 만주로 가기 전부터 조국의 앞날을 염려해 16세 때 1905년 고향에 기호학교를 설립했고,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서울로 가 국권회복운동을 벌였다. 어린시절 부호라고 알려졌지만 조국의 독립을 간절히 열망하던 그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독립운동에 뛰어든다. 이후 청산리 전투를 이끌며 일본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고, 이를 바탕으로 한민족의 자주독립 역량을 입증했다. 대한독립군의 전설 김좌진 장군에 대한 한국과 중국에서 남겨진 업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백야 김좌진 장군.

◇백야 김좌진, 청산리 대첩을 이끌다

백야 김좌진(1889~1930) 장군은 충남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서 태어났다. 당시 집안은 많은 재산과 노비를 소유한 부호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10년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자 김좌진은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일제강점기 국내에서 독립운동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서간도 지역에 독립운동기지를 마련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군자금 확보에 어려움을 겪자 서울의 부호들을 상대로 군자금 모집에 착수했다. 결국 이 사건으로 2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이후 감옥에서 풀려난 김좌진은 1918년 만주로 망명해 대종교에 입교하고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다음해인 1919년 북로군정서군 총사령관이 됐다. 북로군정서는 당시 대종교도들이 북간도지역에서 조직한 중관단에서 시작된 독립군이다. 이어 사관연송서를 설치해 독립군 간부양성에도 온힘을 쏟았고,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사관연성소는 1920년부터 졸업생을 배출했다.
 

연길에서 백두산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는 어랑촌. 현재는 밭으로 변한 모습이다.

이들은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북로군정서의 주축이 된다. 청산리 전투가 일어난 어랑촌 일대는 김좌진 장군과 함께 수많은 독립군들의 터를 마련한 곳이다. 이곳은 연길에서 백두산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다. 매우 협소한 골짜기를 이용해 독립군은 일본군을 크게 물리쳤다. 시간이 흐르면서 독립군이 지냈던 곳은 마을로 변해 현재는 많은 중국인들이 살고 있었다. 마을 근처에는 벼논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데,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군이 이곳에서 벼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또한 이들이 훈련을 했던 곳은 현재 각종 농경지로 변해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중국 흑룡강 밀산일대에는 일제강점기 당시 대한독립군들을 기억하고자 기념비가 마련됐다. 사진은 현재 외교상의 문제로 기념비가 세워지지 않은 모습.

◇신민부·한족연합회 결성

1920년 6월 7일에는 독립군을 추격해 들어온 일본군을 봉오동에서 홍범도, 최진동의 연합부대가 일본군 1개 대대를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3·1운동 직후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많은 독립군 부대들이 편성돼 국내 진입작전을 감행했다. 이후 김좌진은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청산리 백운평전투를 시작으로 완루구·천수평·어랑촌·맹개골·만기구·천보산·고동하 전투 등에서 일본군을 대패시키고 큰 승리를 거뒀다.

청산리 전투 후 서일 총재는 임시정부에 “김좌진 부하 600명과 홍범도의 부하 300여명이 일본군 1천300여명을 격살했다”고 보고할정도로 일본군의 피해가 막대했음을 알 수 있다. 청산리 전투는 한국독립군이 벌인 전투 중 가장 대표적인 전투였다. 또한 일본군의 간도출병을 저지시켰으며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준 전투였다. 그 후 부대를 밀산부로 이동해 국민회군의 안무, 도독부군의 최진동 등과 연합해 대한독립군단을 결성, 부총재에 취임했다. 일본군의 격렬한 보복작전의 전개로 1921년 러시아령 자유시로 이동하다가 이듬해 자유시참변으로 타격을 받고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고 한다.
 

일제에 대항했던 대한독립군.

김좌진 장군은 1925년 신민부를 창설해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으로 있으면서 성동사관학교를 설립했다. 부교장으로 독립군 간부 양성에도 주력했다. 이후 1929년 한족연합회를 결성, 주석에 취임해 황무지개간과 문화계몽사업, 독립정신 고취와 단결을 호소했다. 1930년 1월 24일 산시역 부근 정미소에서 박상실의 흉탄에 맞아 순국했다. 김좌진 장군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됐다.
 

충남 홍성에 있는 김좌진 생가터는 해마다 끊임없이 관람객들이 찾고 있다.

◇충남 홍성에 있는 김좌진 장군 ‘생가터’

충남 홍성군 홍성읍에는 김좌진 장군을 기억할 수 있는 생가터가 재현돼 있다. 홍성의 옛 이름은 홍주(洪州)라고 한다. 고려시대부터 사용한 홍주 지명은 1914년 일제 강점기 지역의 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강제로 홍성으로 변경됐다.

이곳은 충청남도기념물 제76호로 ‘김좌진 장군 생가지 성역화사업’은 1989년 시작해 10년 만인 1998년 1월 생가지 및 기념관까지 완공돼 충의정신(忠義精神)의 계승 발전을 위한 산 교육장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됐다. 1991년 3월부터 생가복원을 시작해 기념관, 사당 등이 함께 위치해 있다.
 

충남 홍성군에 위치한 김좌진 장군 유적지.

기념관에는 당시 청산리 전투 기록과 김좌진 장군의 일대기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전시품이 진열돼 있어 당시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독립전쟁의 상황을 생생하게 체험해 볼 수 있다.

김좌진 장군과 수많은 독립군이 활약한 청산리와 밀산시를 뒤로한 채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한 하얼빈역으로 향했다.
/김영창 기자 seo@namdonews.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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