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광우 작가의 광주의 의인들

(7)나는 왜 이제야 아는가? <호남 의사 열전>을 읽고

김태원의 용맹… 전수용의 신출귀몰

광주 동무등·서어등·북병풍 의병 피로 물들어

“눈을 동해에…일본이 망하는걸 보리라” 유언도
 

한말호남의병장 김태원(김준)장군동상 광주시 서구 농성광장에 1975년 광주·전남시도민들의 성금으로 건립됐다./광복회광주전남지부 제공
구한말 당시 의병 모습./광복회광주전남지부 제공
구한말 당시 의병들이 사용한 화승총.
죽봉 김태원 장군이 동생 김율 의병장에게 보낸 편지. 웃으면서 죽으라고 끝을 맺어 장군의 독립에 대한 기개를 볼수있다./광복회광주전남지부 제공

송사 기우만, 1909년 ‘호남 의사 열전’을 집필하면서 피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먼저 간 의병장들은 모두 그의 동지였고, 제자였다. 의병장 12인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은 그의 소명이었다. 길지 않은 글이었다. 호남 의사 열전에 기록된 의병의 열악한 사정은 차마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었다. 광주 인근의 산야가 다 의병의 전적지였음을 나는 왜 이제야 아는 것인가?

무등산의 뒤에 가면 무동이 나온다. 그곳이 의병 전적지였음을 나는 김준 열전을 읽고 알게 되었다. 김준은 이곳에서 왜장 길전(吉田)을 죽였다. 길전은 괴력의 무인(武人)이었다고 한다. 왜놈들은 공포에 떨었다. “적의 뒤를 밟아 창평 무동촌(舞童村)에 이르렀다. 왜장 길전(吉田)은 싸움을 잘하고 용맹하여 왜놈들이 의지하는 자였다. 교묘한 술책으로 꼬여 잡았다. 수십 발 총을 쏘았는데 죽지 않다가 칼과 돌로 함께 내리치자 마침내 죽었다.”(김준전)

김준은 호남 창의 회맹소의 선봉장이었다. 나주와 함평에서 일본 군경과 40여 회 전투를 치른 맹장이었다. 1908년 4월 25일 광주 어등산에서 전사했다. 무등산이 해가 뜨는 산이라면, 어등산은 해가 지는 산이다. 어등산에서 의병의 피가 강물처럼 흘러내렸다는 사실을 나는 왜 이제야 아는가?

김준의 의진을 이어받은 이는 전수용(全垂庸)이었다. 그의 계략은 백발백중이었다. 전수용 열전을 읽으니 대치가 나온다. 대치라면 광주에서 담양으로 가는 곳, 지금은 한빛고가 들어선 마을이 아닌가? “광주의 대치에서 적을 만났다. 날이 새기 전 총소리가 하늘을 진동하였다. 전투는 반나절 계속되었다. 적은 많이 죽었으나 이쪽 군사는 아무 손상이 없었다.”(전수용전)

광주의 동쪽 무등산도, 광주의 서쪽 어등산도, 광주의 북쪽 병풍산도 모두 의병의 피로 물든 곳이었다. 가을이면 물드는 단풍만 보았다. 그 단풍이 의병의 피였음을 나는 왜 이제야 아는가? 김준의 용맹과 전수용의 신출귀몰과 달리 의병이 처한 물질적 조건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손에 쥔 화승총은 유효 사거리가 불과 12미터였다. “매양 출병할 때마다 양식이 부족하였다. 날은 추운데 옷은 엷었다. 날이 추워 몸이 얼었다.”(기삼연전) 의병들의 뜻은 높았다. 그런데 훈련을 받은 적이 없는 농민들이었다. “훈련되지 않은 군사들이라 적은 많고 우리는 적은 데에 겁을 내어 병기와 행장을 버리고 갔다.” (정원숙전)

남한대토벌 작전, 그것은 전쟁이 아니었다. 토벌이었고, 사실상의 학살이었다. “김준이 어등산에서 순국하자 여러 진이 흩어졌다. 적의 세력은 날로 치성하여 병참(兵站)이 별처럼 많고 바둑처럼 촘촘하였다. 주민들을 강제로 징발하여 산과 들을 샅샅이 뒤졌다. 어찌 할 계책이 없어 마침내 박도경과 함께 잡혔다.” (김봉규전)

이때 의병장 박경래는 부하들에게 포고했다. “군사들은 각자 살 길을 찾으라. 나는 마땅히 한 번의 죽음이 있을 뿐이다.” 단신으로 가협산에 거처하다가 적의 포교(捕校)가 오자 크게 소리를 쳤다. “여기에 내가 있으니 잡아가라.”(박경래전)

호남 창의 회맹소에 결집한 성재 기삼연의 동지들은 모두 의(義)에 살고 의(義)에 죽은 의병장들이었다. 송사 기우만은 의병들의 최후를 이렇게 기록하였다.

어찌 할 계책이 없어 잡혔다. 왜적이 무수히 고문을 가하였다. 그럴수록 의기는 더욱 매서웠고 꾸짖는 혀가 더욱 굳세었다. 왜적 또한 의롭게 여겨 술과 잔을 주며 위로했으나 물리치고 받지 않았다. 적이 꼬드겼으나 크게 꾸짖었다. “어찌 나의 당당한 의를 굽혀 개 염소의 무리에게 살려 달라고 애걸한단 말이냐. 속히 나를 죽이라. 나는 사나운 귀신이 되어 적을 섬멸하리라.” (김봉규전)

마찬가지였다. 신출귀몰한 예측으로 동료들을 감복시켰던 전수용의 최후는 이러했다. “오늘은 내가 죽는 날이다. 내가 죽은 뒤 나의 눈을 빼내어 동해 위에 걸라. 너희 나라가 반드시 망하는 것을 내 눈으로 보리라.” 말을 마치고 죽음에 나아갔다. (전수용전)

김준의 자는 태원이요 호는 죽봉이다. 김태원 의병장은 전남 나주 출신으로 1907년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후 나주와 함평·담양 등지에서 일본 군경과 40여 회 전투를 치렀다. 김태원 의병장은 동생 김율을 비롯 여러 의병들과 함께 40여 차례의 전투를 치르며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1908년 4월 25일, 광주 어등산 전투에서 전사했다.
/(사) 인문연구원 동고송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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