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447)

제4부 풍운의 길 3장 안현전투(447)

“흥안군이란 말이더냐?”

이괄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꼭 필요해서 쓰려던 것이 없으면 아쉽지만 그와 비슷한 것을 대신 가져다 쓴다는 말이 있다. 바로 꿩 대신 닭이다. 인성군이 사라졌으니 흥안군을 대신 왕으로 옹위해야 한다.

“흥안군 나리를 어서 모셔라.”

이괄이 용상 곁 보조 의자인 교의에 앉아 명했다. 용좌에 않은 것은 왕자 흥안군을 배려하기 위해서다.

이윽고 인정전 앞뜰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군사들에게 에워싸인 흥안군이 핼쓱한 얼굴로 뜰로 들어서고 있었다. 조금은 겁을 먹고, 또 조금은 불안한 빛이 역력했다.

이괄이 교의에서 일어나 버선발로 나가 흥안군 앞에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나리를 기다리고 있었사옵니다. 대권을 맡으실 분이 이렇게 행색이 초라하니 받드는 우리가 예가 닿지 못한 듯하여 민망하기 그지 없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열과 성을 다 바쳐서 충성할 것이오며, 하늘을 모시듯 하겠나이다.”

그래도 흥안군은 겁먹은 얼굴이다. 파천길에 중도에 도망을 오긴 했지만 이괄의 연락을 받고 온 것이라기보다 가족의 안부와 인성군 공 형님의 안부도 궁금하고, 이귀 등 배짱이 맞지 않는 자들이 왕을 둘러싸고 있어서 벼 밭에 심겨진 피 같은 신세라는 마음이 들어서 그냥 몽진길을 벗어나버렸던 것이다. 도성에는 처자가 남아있었다.

그가 한양으로 숨어든 것을 파천길의 중신들은 하나같이 그가 이괄 부대에 합류하기 위해서라고 몰아붙였다. 그러나 그것은 우연히 연대가 맞아떨어져서 합류가 되었을 뿐이다.

흥안군이 꾸물거리자 이괄이 그의 팔을 붙들었다. 감히 상감의 옷자락을 만질 수 없지만 그는 마음이 다급해져 있었다.

“상감마마, 어서 용좌에 오르십시오. 폐주 인조의 뒤를 이어 제17대 왕으로서 옥체를 보전하시고, 나라를 굽어 살피셔서 이끄셔야 하옵니다. 태평성대를 이루셔야 하옵니다. 인조 폐주가 망친 나라를 굳건하게 건져올리셔야 하옵니다. 소신이 소신껏 상감마마를 보필하겠나이다.”

이괄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충길이 흥안군에게 다가가 그를 곁부축해 용좌에 앉혔다. 얼결에 용좌에 오르긴 했지만 흥안군은 헷갈리기만 했다. 말로만 용상에 오르는 것 같았다. 그게 맞는 이치인지 몰랐다.

격식대로라면 여민락의 아악이 정중하고도 우아하게 울려퍼져야 하는데 생략되었다. 장악원의 악사들은 인조 임금을 따라 공주로 내려갔으니 울려퍼질 수가 없다. 뿐만아니라 왕실의 존장인 인목대비 김씨가 옥새함을 놓고 등극하는 신왕에게 전수하는 절차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인목대비도 부재하다. 본시 흥안군과 인목대비 사이가 좋은 것은 아니지만 법통을 이어받으려면 이런 절차를 밟아야 한다.

인정전 대하(臺下)에는 만조백관이 금빛 조복을 입고 상아홀을 들고 품계대로 품석(品石) 옆에 도열해 서서 신왕의 즉위를 송축해야 하는데 이런 절차도 없다. 그들 역시 인조를 따라 공주로 내려간 것이다.

흥안군은 옥새도 받지 못하고, 만조백관의 예는 물론 아악의 음악소리도 없이 용좌에 올랐다. 모든 것이 어색했으나 받아들였다. 눈치를 챘던지 군사 중 부장 하나가 군사 취타대를 데려와 취각과 금고(金鼓:쇠북)를 울렸다.

흥안군은 급히 이괄이 준비한 갓 감투를 썼다. 통전관(通天冠:임금이 조칙을 내리거나 정무를 볼 때 쓰는 왕관) 대신 갓 감투를 쓴 것이다. 황금빛 곤룡포 대신 도포를 입고 용좌에 앉으니 어색하고 초라했다. 열두 마디 옥대에 패옥도 차지 않았다. 곁에 왕비가 나란히 위에 올라야 하는데 그것도 없다. 그는 노들나루에서 야음을 틈타 장안에 숨겨둔 처자를 만나러 상경했다가 군사들에게 포위되어 인정전에 들어왔던 것이다.

왕은 권위의 상징인데, 옷차림과 행색이 허술하니 누구도 마음 속으로는 왕으로 인정하지 않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괄은 진지하고 엄숙했다.

“상감마마, 보시다시피 지금 전국은 비상시국이옵니다. 폐주가 도망을 가고, 왕위가 공석이니 그 자리를 메워야 합니다. 전란 속에서 죽은 장수를 대신해 부하가 현지임관하듯이 상감께서 비상 등극하신 것이옵니다. 흥안군께옵서는 대통과 대업을 이어받으셨습니다. 한시가 급하니 조정의 각료를 임명해 정정을 안정시켜야 하겠습니다.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흥안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괄은 평소 생각대로 각료를 임명했는데, 자신이 영의정에 앉고, 나머지 후속 인사는 왕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으로 처결이 되었다.

“상감마마, 민심을 수습해야 합니다. 나라의 곳간을 열어서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눠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왕의 윤허를 받기도 전에 영을 내렸다.

“상감마마의 분부시다. 군사들은 지금 당장 국창으로 가서 문을 활짝 열어서 쌀과 보리를 풀어라. 백성들 먹일 일이 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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