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453)
제4부 풍운의 길 3장 안현전투(453)
“우리가 선제 공격을 했으니 적이 미친 듯이 공격해올 것이다. 적이 화살을 최대한 소모할 때까지 응사를 멈추라. 다만 산으로 기어오르는 놈을 기습해서 베어라. 유격전에 능한 전라도 군사들이 나서라.”
전라도 군사 중에 유격대장 김차수가 자신있게 외쳤다.
“암만이라우. 적병 배때지를 갈라버리는 일은 우리가 적임이제라우. 산병전, 유격전은 전라도 군사들의 주특기요.”
산 정상이 일순 조용해지는가 하는 때에 적의 군사들이 산을 타고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이곳 저곳 산개해 매복한 전라도 병사들이 한 순간에 이들에게 달려들어 단검으로 멱통을 찌르거나 배를 쑤셔박았다.
“물호박에 칼침 놓댁기 칼을 놔버링개 쑥 들어가고만이! 무자게 신나부네이! 모처럼 기술 발휘하는디도 전연 녹슬지 않았단 마시.”
“쉿, 조용히 해야. 저 새끼들이 경계없이 기어오릉개 조용히 입닥치고 있어야 한다마시.”
이괄 군의 한명련 부대 선발대가 고지 점령에 성공한 줄 알고 한명련이 요란한 목소리로 항왜병 150명에게 돌격 명령을 내렸다.
“용병 차례다. 항왜병이 적을 일거에 패퇴시키면 조선의 아리따운 처녀들에게 장가보내주겠다. 출동하라!”
싸우는 데 명수인 항왜병들이 신이 난 모습으로 함성을 지르며 산 중턱을 치고 올라갔다. 그들은 뒤에서 치는 북과 꽹과리 소리에 더욱 힘을 얻은 듯했다. 산새들이 꽹과리 소리에 놀라 푸드득 하늘 높이 날았다.
정충신 부대는 절제된 응전만을 했다. 정충신은 그런 틈틈이 바람의 흐름과 적의 동태를 빠짐없이 살폈다. 반군의 2진이 무악산 쪽에서 안산(안현) 방향으로 접근해오고, 3진과 후위군(後衛軍)은 본진을 엄호하느라 포를 쏘고 화살을 날리고 있었다. 그때까지 관군이 조용해있자 총괄대장 이괄은 신바람이 났다.
“저것들 다 디졌다. 내가 먼저 오를테니 나를 따르라.”
산을 오르는 그의 곁에 한명련이 따랐다. 고지 점령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정충신은 반군이 사정거리에 이를 때까지 기다렸다. 백오십보 이내 거리에 접어들면 가차없이 밟아버릴 요량이었다. 이윽고 백오십보 사정거리에 들어왔다.
“방포하라!”
갑작스럽게 북소리가 울리고, 화차 포신에서 탄환이 날아갔다. 그런데 탄환이 이상했다. 날아간 탄환은 헝겊에 싸인 주먹만한 뭉텅이였다. 헝겊 뭉텅이가 허공에서 터뜨려지자 매운 재가 섞인 고춧가루가 눈발처럼 흩어져 쏟아졌다. 포신에서 연거푸 헝겊 뭉텅이가 열을 품고 날아가 산밑에 흩어져 내렸다.
정충신은 며칠 동안 비밀리에 수색, 고양, 벽제 고을의 농가에서 고춧가루 서른 섬과 매운 재 쉰 섬을 가져다 비축해 놓았다. 그리고 바람의 방향을 살펴서 적병 머리에 쏟아부을 작전을 세웠다. 드디어 이날 적병이 일정 거리에 오자 비장의 무기를 사용했다. 그가 바람의 조화, 적병의 접근 거리를 과학적으로 잰 것도 다 그 때문이었다.
“아아, 눈이 따가워. 앞이 안보인다. 따가워서 눈을 못뜨겠다.”
“내 부대원 어디있나? 나도 눈을 못뜨겠어!”
“아이쿠, 나 죽네. 이게 무슨 고춧가루 벼락이냐?”
적병들이 하나같이 나뒹굴며 아우성이었다.
이때 길마재 산허리 제1선에 포진하고 있던 남이흥 부대가 활을 쏘아 적병을 고꾸라뜨리고, 건너편 바위산에서는 임경업 부대가 창을 들고 달려들어 적병의 배를 찔렀다. 강병으로 소문난 항왜병을 처치한 전라도 병사들은 후미의 반군을 창과 칼로 도륙했다. 그들은 또 항왜병들로부터 노획한 조총으로 올라오는 반군을 하나씩 쏘아 넘어뜨렸다.
한 순간에 전선이 뒤집어졌다. 이괄이 재 아래로 물러나면서 소리소리 질렀다.
“물러나지 마라. 결단코 후퇴하지 말라! 기어이 고지를 점령할 것이다!”
그러나 반군들은 눈을 뜨지 못하고 콜록콜록 기침과 재채기를 하면서 눈을 비벼대며 계속 신음소리를 토해냈다. 손으로 쓰라린 눈을 비비느라 병기도 잡지 못하고 나뒹굴었다.
“궁수부대 쏘아라!”
정충신이 명하자 일제히 화살이 빗발처럼 쏟아져내렸다. 화살이 쏟아질 때마다 반군들이 아악, 억, 으흐흐, 신음소리를 토해내고 하나같이 자빠졌다. 화살에는 독이 묻어있었다. 스치기만 해도 피부가 타들어가는 독화살이었다. 살아도 죽는 것만 못하게 고통스러워했다. 정충신이 다시 명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