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와 땀’으로 일군 항일독립운동의 중심지 ‘용정’

항일독립운동가의 발자취를 따라서-<9>중국 길림성 용정
항일독립운동가의 발자취를 따라서
<9>중국 길림성 용정·연길(완)
‘피와 땀’으로 일군 항일독립운동의 중심지 ‘용정’
만주 항일투쟁을 기리는 ‘3·13 반일의사릉’
‘무장투쟁’의 신호탄…‘만주 15만원 탈취사건 유적지’
 

조선족 연변 자치주가 있는 길림성 용정시에서 명동촌 방향으로 가는 길 왼쪽 산자락에 3ㆍ13 반일 의사릉이 있다.

항일독립운동의 메카라 불리는 중국 용정 등에는 조국을 떠나 머나먼 타국에서 오로지 대한독립을 위해 처절한 삶을 살아야 했던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었다. 일제의 민족말살주의 정책에 맞서 교육을 시작으로 역사, 문화, 언어 등을 전파하며 후손들에게 뿌리를 일깨우기 위해 이곳에서 힘썼던 항일독립운동가들. ‘피와 땀’으로 일군 독립정신은 과거와 현재에도 여전히 용정 등에 곳곳에 살아 숨쉬고 있었다.

◇머나먼 타국에서 ‘3·1’운동을 기리다…‘3·13 반일의사릉’
 

용정시에 있는 ‘3·13 반일의사릉’의 전체모습.

조국의 독립을 위해 희생한 열사들의 시신이 잠들어 있는 ‘3·13 반일의사릉’은 항일정신을 기리는 산 교육의 장소로 불린다. 조선족 연변 자치주가 있는 길림성 용정시에서 명동촌 방향으로 가는 길 왼쪽 산자락에 3ㆍ13 반일 의사릉이 있다.

묘들은 반듯하게 가공된 석재로 둘레를 쌓아올려 보기에 정연했다. 기념비를 중앙에 두고 앞줄에 9기, 뒷줄에 4기 등 13기였다. 기념비 정면에는 한자로 ‘3ㆍ13反日義士陵(반일의사릉)’이라고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비문과 함께 순국한 충렬대 지휘자였던 채창현 등 17명 의사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이들의 희생은 만주지역 조선인들의 울분을 폭발시키는 도화선이 되어 만주 전역에서 50여 회에 걸친 만세 운동이 일어났고 이듬해 15만원 탈취사건, 봉오동ㆍ청산리 대첩 등 무장투쟁으로 확대됐다.
 

‘3·13 반일의사릉’에 들어가기 전 입구에 세워진 묘비. /김영창 기자 seo@namdonews.com

중국 북간도 지역의 3·1운동은 길림성 용정에서 3·13일에 전개됐다. 그래서 이 지역의 3·1운동을 흔히 3·13만세운동이라 표현한다. 만세운동에는 천주교회당의 종소리를 신호로 하여 용정 북쪽에 위치한 서전대야에는 1만여명의 한국인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독립 축하식은 김영학의 ‘독립선언포고문’의 낭독으로 시작됐고, 축하회를 마친 군중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기를 앞세우고 만세시위행진에 들어갔다. 하지만 앞서 이 계획을 사전에 탐지한 일본은 중국관현과 교섭해 중국군대로 하여금 만세운동을 저지하도록 했다.

결국 중국군은 발포를 감행했고, 당시 현장에서 18명이 사망하고 30여명이 부상당했다고 한다. 시위대 중에는 용정 동산학교와 연길 도립중학교에 다니는 한족(漢族) 학생들도 다수 끼어 있었다고 알려졌다.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희상한 이들의 장례식은 1천500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다고 한다.

◇민족교육의 발자취가 남겨진 ‘용정중학교’
 

용정시에 자리잡은 용정중학교는 은진, 대성, 동흥, 광명, 광명여자 중학교, 명신여자 중학교 등 6개교가 연합해 이루어진 학교다. 용정중학교의 교문 좌우측으로 ‘龍井中學’, ‘룡정중학’의 이름이 한자와 한글로 나란히 새겨져 있다. 또 한편에 연합기념비가 서있고 그 옆에는 윤동주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용정중학교에 있는 역사기념관. 이곳에는 윤동주, 김약연, 문익환 등을 소개하고 있다고 한다. /김영창 기자 seo@namdonews.com

1920년대 용정에는 많은 민족학교가 설립됐다. 특히 유교, 천도교, 기독교 등 종교 단체들의 역할이 컸다. 이 때 세워진 대표적인 학교로는 은진, 명신, 동흥, 광명, 대성, 광명여자중학교 등이 있다. 그러나 이들 민족 학교들은 1946년 9월16일 하나로 통합되어 대성학교가 있던 터에 문을 열었다. 그리고 붙여진 이름이 용정중학이었다. 용정중학에 1921년 세워진 대성학교 옛 건물이 복원되어 6개 중학 출신들의 역사 기념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곳에서 가장 눈길을 단숨에 사로잡았던 조형물은 대성학교 입구 쪽에 자리 잡은 윤동주 시비였다. 시비는 2층의 검은색 대리석 위에 대표작 ‘서시’를 새긴 하얀 대리석을 올려놓았고, 그리고 그 위 자연석에 ‘尹東柱詩碑(윤동주시비)’라 쓴 머릿돌이 놓여 있었다.

또 윤동주를 비롯해 김약연 목사와 문익환 목사 등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도 소개되어 있다.

◇독립군자금 마련하고자 일제 자본 탈취
 

용정에서 명동촌으로 가는 길목 우측 냇가의 다리 건너 동량마을 어귀에 ‘탈취 15만원 사건 유적지’. /김영창 기자 seo@namdonews.com

용정에서 명동촌으로 가는 길목 우측 냇가의 다리 건너 동량마을 어귀에 ‘탈취 15만원 사건 유지(奪取十五萬元事件遺址)’ 라는 거대한 비석이 세워져 있다. 높이는 2m 정도로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크기를 자랑한다. 현재는 관리가 잘 되지 않고 있어 이를 설명하는 글 조차 제대로 알아볼 수 없지만 이를 설명해주는 ‘15만원탈취사건 유적적지’라고 씌여진 비석이 있다.

‘탈취15만원사건’을 알기위해선 일제시대인 1920년 1월 만주로 거슬로 올라간다.

3·1운동 이후 간도지역 항일단체들은 무장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하지만 반일무장단체의 결성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반일단에서는 당시 한인사회로부터 군자금을 징수하고 부호나 친일분자에게는 자금을 강제징수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금은 항상 부족했다.
 

‘탈취 15만원 사건 유지’라고 씌여진 비석. /김영창 기자 seo@namdonews.com

이런 상황에서 이들이 생각해 낸 그때 당시의 가장 좋은 방법은 적의 자금을 무력으로 탈취하는 것 뿐이였다.

1919년 최봉설, 임국정, 윤준희, 한상호, 박웅세, 김준 등은 철혈광복단을 조직하고 군자금을 모으기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던 중 조선총독부가 회령에서 용정으로 조선은행권 15만원을 운송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들은 1920년 1월 4일 동량 어구의 숲 속에 매복해 있다가 현금을 수송하는 마차를 습격해 15만원을 탈취하는데 성공했다. 이 돈은 만주 철도 건설 등에 쓰일 예정이었다고 한다.

그 시절 총 한 자루 값이 20~30원이었다니, 15만 원이면 적게는 5천명, 많게는 7천500명이 무장할 수 있는 금액인 셈이다.

이들은 15만원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사관학교를 세우고 군사인재를 양성과 무기를 구입해 군대를 편성할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1920년 1월 10일 최봉설, 임국정, 윤준희, 한상호는 무기를 구입하고자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으로 들어갔다. 여기에서 만난 사람은 1908년 안중근과 함께 국내진공작전을 펼쳤던 의병장 엄인섭 이었다.

엄인섭은 1908년 안중근과 함께 두만강을 건너 국내진공작전을 펼친 인물이다다. 그러나 그 엄인섭은 옛날 의병장 엄인섭이 아니었다. 당시 그는 변절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무기상을 하면서 일본의 첩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엄인섭의 밀고,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최봉설을 제외한 3명의 단원은 현장에서 체포되고 무기 구입은 수포로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1921년 8월 윤준희, 한상호, 임국정 등은 모두 서대문 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지고, 현금은 고스란히 일본은행에 반납되었다. 그때 윤준희는 30세, 한상호는 23세, 임국정은 27세였다.

만약 엄인섭의 밀고가 없었더라면 만주와 연해주에서의 독립운동의 상황은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을 것이다. 엄인섭의 별전을 세 청년의 목숨뿐만 아니라 조국의 독립을 앞당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날려버린 것이다.

항일독립동의 중요 역할을 했던 용정 곳곳에는 여전히 많은 독립운동의 역사 흔적들이 남아있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유적지들이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사실상 방치되고 있어 우리정부의 각별한 관심이 필요해 보인다.
/김영창 기자 seo@namdonews.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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