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었으면 이순신도 없었다(若無湖南 是無李舜臣)
최영태(전남대 사학과 교수)

영국 해군 제독 넬슨(Horatio Nelson)은 1790년대에 있었던 두 번의 전투에서 각각 오른쪽 눈과 오른쪽 팔을 잃었다. 그는 한 때 이런 불운에 좌절하기도 했지만 죽는 날까지 군인으로서 그의 조국 영국을 위해 헌신했다. 그는 1798년 나일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고, 1805년에는 트라팔카 해협에서 프랑스·에스파냐 연합 함대를 격파하여 프랑스의 영국 침공을 완전히 단념하게 했다. 그는 트라팔카 전투 때 적의 총탄을 맞고도 계속 전투를 지휘한 후 승리가 눈앞에 다가오자 “하느님께 감사한다.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다했다”라는 최후의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군인으로서 넬슨 제독의 삶은 영국을 넘어 전 세계인으로부터 존경받기에 충분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순신 장군의 위대함을 이야기할 때면 세계적 영웅으로 추앙받는 넬슨 제독과 비교하기를 좋아한다. 나도 강의시간에 넬슨을 거론할 때면 어김없이 이순신을 상기시킨다. 이 경우 나는 항상 이순신이 넬슨보다 더 위대하다는 사적 견해를 덧붙이곤 했다. 내가 이순신을 넬슨보다 더 위대하다고 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넬슨이 이끈 영국 해군은 세계 최고의 해군이었고, 게다가 그는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싸웠다. 반면에 이순신은 임금과 조정 대신마저 그를 믿지 못하거나 시기했고 전쟁 도중 그를 소환하여 옥살이까지 시켰음에도 변함없이 국가를 위해 헌신했다.’

주지하다시피 이순신은 한성에서 태어났고 외가는 충남 아산이었다. 이것은 그의 성장 과정이 바다와 무관함을 의미한다. 이순신은 관직에 나간 이후에도 주로 육지에서 근무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할 때까지 이순신의 바다 주변 근무는 발포(고흥) 만호 경력과 전라좌수사 경력을 합하여 총 2년에 불과했다. 그런 그가 해전에서 연전연승했다는 것은 이순신의 전략 전술과 리더십이 그만큼 탁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그는 분명 특출한 개인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그의 성공을 설명할 수는 없다. 그의 성공 요인에는 플러스알파가 있었다.

역사학자 E. H. 카는 그의 명저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위인은 특출한 개인임과 동시에 대중과 함께 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순신도 그랬다. 여기서 이순신과 함께 한 대중은 다름 아닌 전라도의 민초들이었다. 전라도의 수군들은 언제나 이순신의 동료였고 충실한 손발이었다. 어부들은 변화무쌍한 물길을 안내했고 자신들의 배를 내놓았다. 또 농부들은 식량과 물자를 조달해주었다. 임진왜란에서 이순신의 연승은 그의 뛰어난 리더십에 덧붙여 이순신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그와 함께 싸운 전라도 민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정유왜란 도중 이순신은 선조 임금과 조정에 소환되어 혹독한 고문과 함께 한 달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간신히 죽음을 면한 이순신이 다시 3군통제사로 전라도 땅을 밟았을 때 그 앞에 남겨진 전력은 배 12척이 전부였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의 재기는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전라도 수군과 어부, 농민들은 전라도 땅을 밟은 이순신을 다시 따뜻이 맞이했다. 그리고 이순신을 도와 명랑대첩이라는 놀라운 역사를 만들었다. 이순신의 인물됨을 알아본 사람들은 오로지 전라도 민초들뿐이었다.

이순신은 호남인들의 이런 역할에 감사하며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若無湖南 是無國家)”라는 말을 남겼다. 나는 수업시간에 이 말을 살짝 응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곤 한다. “호남이 없었으면 이순신도 없었다(若無湖南 是無李舜臣)”. 한마디로 말하여 우리가 아는 세계적 영웅 이순신은 호남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지난 11월 3일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이 발발한 지 90주년이 되는 날이다. 또 11월 19일(음력)은 이순신 장군이 1598년 노량해전에서 조국을 구하고 삶의 최후를 마친 날이다. 11월을 맞이하여 민족민주운동의 중심지인 내 고장 전라도가 더욱 자랑스럽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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