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을 하더라도

김 홍 식(광주국공립중등교장회장·일동중 교장)

그 누구도 원치 않는 일이지만 재난은 예고 없이 다가온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우리들의 방심과 무관심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도둑처럼 들이닥친다. 막상 발생하면 허둥지둥하며 평소의 안이함과 소홀함을 탓해 보지만 이미 때는 늦다. 소중한 인명이 다치고 희생되는 모습을 목도하면서 더 이상 사람의 실수나 잘못으로 빚어지는 재난은 반복되지 않아야한다고들 목소리를 높이지만 썩은 줄 하나 제대로 베지 못하는 무딘 낫처럼 둔해져 가는 사람의 감각을 어찌 하랴! 너무도 값비싼 대가를 치르면서 안전에 대한 국민들의 의식이 많이들 높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채우고 보완해야할 부분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여자필드하키 국가대표 출신 김00씨! 1999년 화성 씨랜드 화재로 유치원생 큰아들을 잃은 뒤 두 번 다시 이런 어처구니없는 피해를 입고 싶지 않다며 뉴질랜드로 이민을 간 사실을 우리는 너무도 아프게 기억하고 있다. 심지어 국가가 준 훈장까지 반납해 버리고 조국을 떠날 때의 심정은 그 얼마나 참담했겠는가.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더 이상 안심하고 맡길 수 없는 나라라고 생각했으니 당사자는 물론이고 지켜보는 사람들 모두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 뒤에도 크고 작은 재난은 끊임없이 반복되고 우리들의 가슴 속에 결코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끔찍한 세월호 대참사까지 겪었으니….

전국 교육장 회의의 일정 하나로 제주 국제학교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방문단에게 학교 설명을 하던 담당자가 갑자기 한 가지 양해를 구할 일이 있다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오늘 화재대피 훈련이 있는데 모두 협조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 누구도 예외 없이 훈련에 참여해야 하기 때문이란다. 우리 일행도 당연한 일로 받아들였는데 뒤따르는 부연 설명이 놀라웠다. 오늘 훈련 사실을 아는 사람은 자신과 학교장뿐인데 우리가 외부방문객이어서 미리 귀띔해 준다고 했다. 그렇다면 모두가 실제상황으로 알고 대처한다는 것인데 학교 구성원들이 보여줄 대응태도가 매우 궁금해졌다. ‘아, 이렇게도 훈련을 하는구나. 모두 사전에 예고된 상태에서 하는 훈련만 했을 뿐 아직까지는 못 보던 모습인데….’

드디어 화재경보가 울렸다. 화재가 발생했다고 생각한 모든 구성원들은 일제히 하던 일을 멈추고 질서정연하게 대피하기 시작했다. 급식실에서 점심을 준비하고 있던 분들도 조리 중이던 가스불을 끄고 신속히 운동장으로 대피하는 걸 보니 사전에 몰랐던 게 분명했다. 모두들 하나같이 훈련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진지한 모습이었다. 소방관들과 소방차도 신속하게 도착했다. 대피가 모두 이루어진 뒤에서야 관할 소방서장이 마이크를 잡고 강평과 함께 훈련에 적극 참여해 준 데 대해 감사의 인사를 했다. 이어 모두가 훈련 상황이었다는 데에 안도하면서 불평 없이 다시 각자의 위치로 되돌아가는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한마디로 훈련다운 훈련이었다. 한 번을 하더라도 훈련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재난에 무지한 자, 재난 앞에서 분노할 자격도 없다”는 한 재난전문가의 말이 떠오른다. 말로만 ‘실전같이’를 외칠 일이 아니다. 우리의 전부를 지키는 일이다.

화재 벨이 울려도 ‘누가 장난했나 보다’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제대로 대피하지 않는 상황이라면 유사시에 어찌할까? 실제 상황이 발생하면 그때 신경 써서 잘하면 된다는 통 큰(?) 생각이 위험을 넘어 더 큰 화를 자초한다. 귀찮고 짜증스러운 일로 받아들이면 훈련은 제대로 되지 않는다. 불과 며칠 전, 광주J초 화재 때 교직원들과 학생들이 보여준 신속하고 체계적인 대응에 대해 칭찬이 자자하다. 이런 일이 사전에 실전과 같은 훈련 없이 가능한 일이었겠는가? 차제에 재난훈련은 예고된 훈련이 아니라 불시에 이루어지는 훈련으로 바꿨으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물론 고려해야 할 점이 많고 이런저런 이유로 어려운 측면도 있겠지만 어디 재난이 사전에 예고하고 오던가!

재난 앞에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천추의 한으로 남을 값비싼 대가를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천재도 아닌 인재성(人災性) 재난이 자꾸만 반복되어서는 정말 곤란하다. 잃을 것 다 잃고 나서야 부산떨며 책임이니 대책이니 운운해 봐야 별 소용없다. 재난선진국이 되어 가는 일,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기꺼이 감내하며 모두가 함께 해야 할 일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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