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469)

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469)

인조는 정충신과 남이흥을 자정전(資政殿:경희궁에 딸린 전각으로 숭정전 뒤쪽에 있는 편전)으로 불러냈다. 조선시대 궁궐에서 큰 행사를 하던 곳이 정전이라면, 왕과 신하들이 모여 회의를 하는 곳이 편전이다.

궁 구역의 명칭을 용도별로 살펴보면 크게 정전, 편전, 침전으로 나뉜다. 정전은 경복궁의 근정전이며, 문무백관의 조하(朝賀:신하들이 국경일에 조정에 나아가 임금에게 하례)를 비롯한 국가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곳이고, 편전은 왕이 평소 정사를 보면서 문신들과 함께 경전을 의론(議論)하는 곳으로 사정전, 만춘전, 천추전이 이에 속한다. 계절에 따라, 회의 용도에 따라 편전을 바꿔 사용한다. 침전은 강령전, 교태전으로 불리는데 ‘교태’는 주역에서 따온 용어로 위로는 곤(坤)이고 아래로는 건(乾)이 합쳐진 형세를 갖추고 있다. 하늘과 땅의 기운이 조화롭게 화합하여 만물을 생성한다는 뜻이니, 왕과 왕비가 침전에서 2세를 생산한다는 곳이다. 그러나 왕이 교태전에 머문 것은 연로했을 때거나 병약하던 때이며, 정력이 왕성했을 때는 마음에 드는 후궁이나 상궁의 방을 찾는 경우가 많았다. 말하자면 왕에게는 궁궐 전체가 음욕을 채우는 자유가 무한 허용된 장소였다.

인조는 정충신과 남이흥만을 특별히 따로 불렀으니 어떤 목적이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가주서(假注書:승정원의 주서를 대리한 관직으로서 주서의 주임무였던 승정원의 일기를 기록, 정리하는 사람), 겸춘추(兼春秋:史官職의 하나로, 정무를 기록하던 춘추관에 소속된 벼슬) 안홍중, 안홍중을 보좌하는 기사관(記事官:춘추관에 딸려 정사 기록을 맡은 벼슬) 이성신 등 사초 기록자들을 불렀다. 기록을 분명히 남겨두기 위해서였다. 왕의 곁에는 도승지 한효중이 앉아 있었다.

“내가 두 장수를 부른 것은 역도들을 토평한 공로를 사심없이 듣기 위함이다. 안현고개에 진을 쳐 이괄 잔당을 물리친 것은 가상한 일이나, 벌써부터 논공에 대한 시비가 적지 않다. 괄의 난을 겪고도 또 논공행상으로 시끄러우니 공들의 얘기를 듣고 싶다. 안현전투에서 선봉이 된 자는 몇이며, 그들의 이름은 누구인가.”

“그들의 이름을 일일이 기록하지 않았으나 낱낱이 알고 있사옵니다.”

정충신이 대답했다.

“쌍방 접전하였으나 관군측, 즉 아군측은 죽은 자가 없다고 하니 무슨 까닭인가.”

“우리 군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유리한 지형에 진을 쳤으므로 역도들의 화살과 포탄이 미치지 못했으며, 적장 한명련을 닮은 적의 좌영장 이양이 탄환에 맞아 말에서 떨어져 죽자 우리 군사들이 한명련이 죽었다고 보고 사기가 치솟아 용기백배해서 싸웠기 때문입니다.”

“역도들 중 고개에 오른 자는 몇이나 되었던가.”

“중턱에 오른 자가 사오 백이옵고, 앞서 죽으면 그 뒤에 적도가 계속 올라와서 정확한 수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이번에는 남이흥이 받았다.

“이괄은 그때 어디에 있었던가.”

정충신이 답했다.

“이괄은 고개 중턱 바위 뒤에 숨었다 나왔다 하면서 군사 지휘를 하였고, 한명련은 끝내 탄환을 맞고 다리 한쪽이 너덜거렸나이다.”

“그 지경에서도 어찌 말을 탔단 말인가.”

“성안으로 들어와서는 기절하였습니다. 이때 그들의 위세는 꺾였나이다.”

“반란군이 남하하는 동안 관군이 그들의 향방을 정탐하지 못한 까닭은 뭔가. 도성에 와서야 물리친 이유는 또 무엇이렸다?”

“역도들이 자신들의 주력을 분산시켰기 때문이며, 남진 길을 동으로 잡았다가 서로 잡았다가 진로를 교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가운데도 행군하는 데 있어서 복병을 매복시켰다가 십여리를 간 뒤에야 거두어서 관군이 가벼이 접근하지 못했습니다. 신은 이런 그들이 계속 행군하다보면 지치리라 보고, 요소요소에서 아군을 매복시켜 유격전을 펴 전력을 약화시켰나이다. 그런 중에 아군이 힘들었던 것은 적도들이 앞에 가면서 모든 양초(糧草:군대가 먹을 군량과 말을 먹일 풀)를 없애거나 태워 우리 군사와 말이 몹시 허기가 졌던 사실이옵니다.”

“과인이 듣기로 반란군이 분탕(焚蕩:고을의 재산을 거덜내고 소동을 일이키는 일)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영변 출발시에는 그런 일이 없었으나 봉산 땅 이후부터서는 곳곳에서 분탕하여 관군이 먹을 것을 없앴습니다. 관군이 마탄에서 추격할 적에는 굶주린 자가 많아 탈영한 자들이 있었나이다. 장만 도원수 어른께서 이를 보고 전대(戰帶) 수백 자루에 밥을 담아 보냈습니다. 신이 즉시 전대의 밥을 군사들에게 고루 나누어 먹게 하였더니 군사들이 눈물을 흘리며 감격해했습니다.”<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4권, 인조2년,1624.3.3.:승정원일기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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