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폐청산 정부의 몰락
박상훈(정치발전소 학교장)

‘법치’(Rechtstaat) 없이 민주주의 없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강자도 법 앞에 평등해야 한다는 ‘법의 지배(rule of law)’ 없이 정의의 원칙을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치와 정치는 엄연히 다르며, 정치의 역할 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인간 사회는 없다.

법은 이미 행해진 과거의 행동을 다룬다. 법의 심판은 미래를 책임지지 않는다. 반면 정치의 시야는 미래에 있다. 시민 주권을 위임받기 위해 정치가들이 내놓는 공적 약속이 과거로 향하는 경우는 드물다. 법이 과거의 부정의를 단죄함으로써 정의로운 미래를 여는 데 기여할 수는 있지만, 법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갈등과 적대 사이에서 사회를 통합하고 공동체를 한발 앞으로 이끄는 일은 정치만이 할 수 있다. 법치나 법의 지배는 권위주의나 독재 때도 작동할 수 있지만, 민주주의가 정치의 역할 없이 선한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2014년 세월호 침몰사고로 위기에 몰렸을 때 박근혜 전 대통령은 “국가대개조”와 “적폐청산”을 들고 나왔다. 이 과정에서 대통령에 반대하며 “매일 싸움질만 하는” 국회와 야당은 적폐 국회, 적폐 야당으로 비판되었다. 2015년에는 국정교과서 정책이 덧붙여졌는데, 그러면서 기존 교과서도 “좌편향”의 적폐 교과서가 되었다. “귀족 노조”와 “좌경 세력”은 “좌익 적폐”로 연결되었고, “종북 척결”도 적폐청산의 과업이 되었다. 모든 것이 “국가대개조에 힘쓰는 대통령”과 “적폐 세력” 사이의 싸움으로 정의되었고, 이 싸움에 적극적이지 않은 집권당 내 이견 그룹에 대해서는 “배신자”라는 낙인이 부여되었다. 요컨대 민주 정치의 역할은 사라지고 모든 게 적폐를 청산하기 위한 역사적 투쟁으로 치환되어 버린 것이다.

적폐(積弊)는 옛날 말이 아니다. 1890년대부터 해방 이전까지 60년 동안 신문에서 - 폐단이라는 말은 있었어도 - 적폐라는 단어가 등장한 예는 없다. 그 뒤에도 “조국근대화”와 “구악일소”라는 말은 썼지만, 적폐나 적폐청산이란 말은 보기 어려웠다. 1993년 집권한 김영삼 정권 시기 “신한국 건설”을 위해 “30년 적폐를 씻어내(자)”는 정도가 정부의 공식 담론으로는 처음이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그때에도 적폐라는 표현이 많아진 것은 아니다. 박근혜 정권 이전 25년 동안 국회 발언 가운데 적폐라는 단어가 등장한 예는 단 15회에 불과했다. 반면 박근혜 정권 시기 그 빈도는 500회 가까이 되었다. 세월호 관련한 사회적 비판이나 야당의 반대를 제어하고 갈등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자 한 것이 그 이유였는데, 흥미로운 것은 그 결과다.

적폐청산과 국가대개조가 앞세워지면서 대통령은 책임 있는 정치 행위자의 한 사람이 아닌, ‘정치 위의 국가’와 동일시되었다. 한 명의 정치가로서 의회나 야당과 함께 일하기보다는 자신을 ‘국가 지도자’로 잘못 여기고 정치 밖에서 정치를 향해 야단치고 지시하고 요구하기만 했다. 이를 위해 열성적인 지지자들이 대거 동원된 것도 중요한 특징이었다. 2015년 10월 열성 지지자들이 나서서 “국회개혁법국민연합”을 결성했다. 뒤이어 천만인 서명운동이 시작되었다. 역사상 최초로 현직 대통령이 국회를 압박하는 이 국민운동에 참여하는 일도 이때 일어났다. 이렇게 해서 대통령은 스스로 정치로부터 멀어졌고, 이듬해 총선 패배와 함께 정치로부터 소외되었으며, 결국 청와대 은둔 생활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 끝이 무엇이었는지는 모두가 안다.

3공화국 때의 “구악일소”나 5공화국 때의 “사회정화”처럼 적폐청산은 ‘반대할 수 없는 말’이다. 반대할 수 없는 것이 국가 목표가 되면 이견은 허용될 수 없다. 이견이 억압되면 토론과 협상을 생명으로 하는 민주 정치는 숨을 쉴 수가 없다. 누가 구악일소에 반대할 수 있고, 사회정화를 하지 말자고 할 수 있으며, 적폐청산은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적폐 협력세력, 적폐 방조세력으로 공격받기를 감수하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다. 적폐청산의 소명을 지닌 열성 지지자의 공격도 피할 수 없다.

민주주의에서 정치는 공동체의 미래를 둘러싼 진보와 보수 사이의 창조적 경쟁을 이끌 때만 선한 효과를 발휘한다. 적폐를 둘러싼 과거사 전쟁은 적대와 증오, 분열과 상처, 원한과 복수의 열정을 키운다. 검찰의 위세만 키우고, 공동체를 분열시키며, 지지자들 사이에서 공격적인 심성만 자극한다. 박근혜 정권은 그 때문에 몰락했고, 이후 모든 정권은 박근혜 정권처럼 하지 않아야 할 책임을 안게 되었는 바, 문 정권 역시 예외일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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