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471)

제4부 풍운의 길 4장 대수장군(471)

이윤서 무리는 이괄이 반역을 일으켜 군사를 몰아가자 비밀리에 글을 써서 초관(哨官) 왕유영에게 샛길로 가 평양의 원수부에 이괄에게 합류한 것은 진의가 아님을 전하도록 했다. 그는 첩과 두 딸도 원수부로 보낸 뒤 별장 유순무와 함께 이괄을 베어 죽이려 했으나 기회를 잡지 못했다고 했다. 이윤서는 막영에서 이괄의 교만한 행태를 보고 실망한 나머지 군영을 벗어나려 했던 것이다. 사람 좋은 장만은 한때의 부하인 그를 너그럽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정충신은 원칙에 투철했다. 사람좋은 것은 덕장의 품성이지만 전쟁 중에는 엄격해야 했다. 그것이 장만과의 차이였다. 장만은 도량이 넓었다. 호방한 가운데 자질구레한 절차에 얽매이지 않으며 남들과 대처하면서 다투지 않았다. 집에 있을 때나 관직에 있을 때나 기쁘고 노여운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으며, 큰일을 당해서도 의연했다. 평소 성품이 이러했으므로 위난에 처해서도 너그러움을 기본으로 했다.

이윤서가 죽었다. 그는 장만을 만나 “제가 역적 놈을 베어 죽이지 못하고 도성에 들어오게 하였으니 무슨 낯으로 천지 사이에 서 있겠습니까?”라고 울부짖었다. 그는 종을 시켜 종장(宗長:가문의 족장)에게 알리도록 하고 “내가 죽을 곳을 얻었으니 이를 선조의 사당에 고하여 주시오” 하고 자결했다.

이런 것을 보고 장만은 정충신을 가리켜 “지혜와 전략과 용맹으로는 최영, 이순신을 능가하는데 단 하나 부족한 있으니 아쉽도다”하고 애석해 했다. 싸움에 능하지만 바다와같은 도량만 있다면 도원수 이상도 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본 것이다. 하긴 이순신이 도원수를 못했어도 나라를 구한 영웅이었으니 꼭 그 반열에 오를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장만의 욕심은 정충신에 관한 한 무한대였다.

왕이 어전회의를 소집했다. 이날은 이괄의 난 논공을 마무리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말이 많았다. 그중 이서에 대한 음해가 있었다. 서북지방에 출진해 머뭇거리다 이괄에게 후방진출로를 뚫렸다는 비난이었다.

“임진강을 사수하지 못한 것은 이서의 죄가 아니지만, 청석동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싸우지 않았으니 이것은 그의 죄로다.” 왕이 말했다.

“마마, 이서는 머뭇거리며 나아가지 않을 사람이 아니니 좀더 조사를 해보아야 합니다.”

“경은 언제나 자애롭구려” 하며 왕이 논공에 대한 적합성을 명토박기 위해 물었다.

“안현 싸움에서 누가 원공(元功)이 있는가.”

“전적으로 안현 싸움을 주장하여 획책한 사람은 첫째가 정충신이요, 둘째가 남이흥이옵니다.”

그러자 우의정 신흠이 나섰다.

“상감마마, 적을 평정시킨 뒤 공을 논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인 바, 먼저 군사들의 마음을 달래서 기쁘게 춤을 추도록 해준 뒤에 논공을 평가해 공정하게 녹훈해야 할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이미 여러모로 살폈다.”

좌의정 윤방이 아뢰었다.

“영상(이원익)이 병중에 나오시지 못하자 진하(進賀:나라에 경사가 났을 때 백관이 왕에게 축하를 올리던 일)를 올렸음에도 윤허를 받지 못하였나이다. 진하의 계청에 윤허하시지 않으신 것은 영상을 생각하시는 아름다운 일이니, 영상 출근시 다시 검토해볼 일입니다.”

그들은 쓸데없애 녹훈을 지연시키겠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국사를 논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가지고 노는 공깃돌처럼 사안을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며 군림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군중에서 군율을 어기고, 군사 진격에 위해를 가한 자는 없었던가?”

장만이 대답했다.

“신의 군중에는 군율을 어긴 사람은 없으나 편비(대장을 보좌하며 소속 부대를 지휘하던 무관직 이라고도 함)와 젊은 군졸 한둘은 벤 일은 있습니다. 마작으로 출진을 놓쳤습니다.”

“이인경은 어땠는가?”

“이인경은 기탄(안양천의 옛이름) 싸움에서 미처 진을 이루지 못하여 패했습니다. 이 죄로 보면 베어야 했지만 앞의 전투에서 거둔 승전을 참작하여 결장(決杖:곤장으로 형벌을 집행하는 일)으로 대신하였나이다. 신경진은 불러도 오지 않았고, 적도 앞에서 머뭇거리는 자취가 뚜렷하여서 처단하려 하였으나 아버지의 공훈을 생각하여 방면하였습니다.”

신경진은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왜군에 패하자 자결한 신립 장군의 아들이다.

“하긴 신립은 탄금대에서 패하긴 했으나 북변에 침입한 이탕개를 격퇴하고 두만강을 건너가 야인의 소굴을 소탕하고 개선한 장수지. 사람 좋은 도원수가 두루 헤아리는군.”

1624년 3월 여드렛날 왕은 이괄 역난(逆亂) 평정에 공이 큰 사람들을 골라 논공행상을 했다. 공신 훈호(勳號)를 진무공신이라 하고, 1등공신에 장만, 정충신, 남이흥이 만장일치로 채택되고, 나머지 훈호에서 분란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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