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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481)

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481)

5부 정묘호란 1장 다시 백척간두에서 (481)

정지 할아버지의 묘가 크고 우람한 것에 비해 그의 선친 정윤의 묘는 있는 듯 없는 듯 초라하게 평토되어 있었다.

하긴 정지 장군의 묘는 국가 원수급으로 예장된 국가가 조성한 것이었다. 네모꼴로 무덤을 만들어 4각 둘레에 석축을 쌓은 것은 고려 후기의 묘제(墓制)로서 호남 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고려시대 국가 원수급에게 준하는 대표적 예장의 묘였다. 정지 장군의 위업과 무게감을 상징해주는 묘였으며, 오늘날 고려시대 최상층 예장문화를 가르는 표본이 되었다.

그후 인조 대(1644)에 정지 장군의 유훈을 기려 경렬사를 세워 제향했다. 숙종 대(1719년)에는 정지 장군의 9대손 충무공 정충신도 함께 배향하고, 설강 유사, 송설정 고중영, 구성 전상의, 송암 유평, 고중영의 아들 고경조, 시은 유성익 등 8현을 모셨다고 유허비에 기록되어 있다.

경렬사는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손되었으나 그로부터 약 100년 후인 1974년 후손들이 사단법인 정지 장군 유적보존회를 설립해 국가와 함께 1981년 정지 장군 묘소 옆에 새로 경렬사를 지어 오늘에 이르렀다. 이 사우(祠宇)는 철골 기와집으로 지어졌다.

정충신은 아버지의 묘가 너무도 초라한 것에 우선 놀랐다.

“왜 이렇게 아버지의 묘가 평토되어 있습니까?”

정충신이 내용을 몰라 따라온 집안 어르신에게 물었다.

“확실하니 아는 것은 아니네마는, 할아버지에 비해 활약이 빈약하니 그렇게 된 것 아니겠나. 정윤 아저씨는 늘 뒤에 물러서서 집안 일을 도우신 분이여. 음지에서 양지를 위해 일하신 분이지. 그래서 조용히 숨어서 할아버지를 모시겠다는 뜻도 가지고 계셨지. 그 점이 참작되지 않았겠는가?”

집안 어르신은 그 나름으로 평토 묘 조성 이유를 해석했으나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정충신은 성묘를 마치고, 인부를 시켜 봉분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평토 그대로 두고 가기에는 웬지 가슴이 아팠다. 국경 전선을 누비다 보니 아버지 상을 치르지도 못하고, 묘마저 허술하니 불효막심한 것 같았다. 아버지에 대한 마지막 효도로 봉분이나마 제대로 마련하자는 것이 그의 뜻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사정이 있었다. 그의 위세가 대단한지라 어느 누구도 봉분을 거부하는 사람이 없었으나, 실상은 정지 장군 묘와 정지 장군 아들 묘 사이에 끼어 들어가 정윤의 묘가 세워진 것이다. 그러니까 정윤의 묘는 정지 장군 묘 바로 밑에 세워지고, 그 밑에 정지 장군 아들의 묘가 들어선 것이었다. 정윤은 정지 장군의 8대 손이다. 법도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세워졌다.

어느날 스님이 정지 장군 묘역을 지나가면서 정윤에게 명당을 점지해주었는데, 바로 그 자리가 지금 정윤의 묘택이 된 것이었다. 그래서 체면상 봉토를 하지 않았다. 그 내용을 알지 못한 정충신은 아랫것들을 시켜 아담하게 아버지의 봉분을 조성했다. 정충신의 지체와 위세 때문에 사람들은 아무도 이의를 달지 못했다.

고향 나들이는 하루하루가 바빴다. 초청하는 곳도 많았다. 정충신은 여기저기 방문한 다음 답례로 일가 친척과 친구, 노인, 이웃 주민, 아전들까지 청하여 크게 잔치를 열었다. 광주 목사가 소식을 듣고 물자를 많이 보내왔으나 정충신은 이를 모두 되돌려 보냈다.

“이 맛있는 음식과 고기가 모두 우리 고을 백성들의 피땀인데, 어찌 받을 수 있겠는가.”

“사절하지 말란다고 특별히 분부하셨습니다.”

병방이 아뢰고 고개를 수그렸다.

“그것이 아니어도 내 감당으로도 충분하다. 정 원한다면 어려운 이웃에게 나누어 드리라고 전하거라. 나는 잔치를 마치면 창평 재촌 옛집을 방문하고, 죽곡에 있는 선영을 다시 살필 것이다. 가는 곳마다 물건을 보내면 남보기 민망하고, 가지고 다니기도 귀찮고, 무엇보다 심사가 불편하다.”

그러나 광주 목사는 다른 데 뜻이 있었다. 정충신이 임금의 각별한 신임을 받고 있는 것을 안 이상,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는 것이었다. 왕실의 햇볕만 쬐도 그 양기가 3대에 뻗친다는데 정충신이 인조왕을 바로 세운 이괄의 난 일등공신이었으니 그 입김만으로도 전라감사나 평양감사쯤 받을 수 있는 배경이 되는 것이다.

정충신이 선영을 둘러보러 길을 떠나려 하자 광주 목사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제가 동행해야지요. 물건을 모두 돌려보내니 소인이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소인이 직접 수행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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