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487)
5부 정묘호란 1장 다시 백척간두에서 (487)

“한때 신 밑에서 복무했던 지계체 중군장의 말을 옮기겠습니다. 그들은 주민을 삽니다.”

“주민을 사다니? 군대를 사서 대신 군문에 보낸다는 말인가?”

“일반적으로 백성들은 대저 군사들을 두려워합니다.”

“왜 두려워하는가.”

“군량 징발 때문이지요.”

“전라도 병사들도 그러하지 않나? 나라 재정이 부족하니 식량 보급을 고을에 의존하는 것 아니겠는가.”

“물론 그들도 병참선을 확보해 보급 투쟁을 하지요. 하지만 다릅니다.”

“어떻게 다르단 말인가?”

“양식을 가져오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합니다. 돈이 없기 때문에 노동을 하는데, 겨울철 땔나무를 한 짐씩 해다 집집마다 날라주고, 농기구를 수선하고 절구를 만들어 주고, 허물어진 담을 보수해줍니다.”

“부당하게 양식을 가져오지 않는다는 말이렸다?”

“그러하옵니다. 지계체 장군의 휘하 병사들이 대표적입니다. 울력으로 마을 일을 도와줍니다.”

“울력이란 일손이 모자라는 집에 가서 가사를 돕는다는 것이 아닌가.”

“그러하옵니다. 보수나 노동의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고을을 도와주는 봉사적 노동협동 방식으로서 전라도 전통사회에서 촌락 주민들이 힘을 모아 돕는 일입니다.”

“먹을 것을 조달하되 노동으로써 갚는다?”

“그러하옵니다. 전라도에서는 일손이 모자라는 노인이나 환자가 있는 집, 초상을 당한 집과 같이 어려운 사정으로 노동력이 모자라는 집의 일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허면 모든 군사에게도 이런 울력을 하도록 하면 되렸다?”

“그것은 자발성이 있어야지, 강제성이 있으면 효과가 없습니다. 어쨌든 먹을 것이 주어지니 잘 먹고 들어와서 부대의 부서진 성곽을 보수하고, 축성을 합니다. 지계체 중군장과 휘하 병사들이 그러하니 싸우는 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전투를 벌이는데 고을사람들이 돌을 날라다 주고, 주먹밥을 해나릅니다. 그들은 현지 귀임하기 위해 떠났습니다.”

“허면 빈 국방력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

“앞으로 3만명의 군병을 양성하여 1-2년 잘 훈련시키면 국토 수호는 물론, 잃어버린 요동 땅도 빼앗아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진 땅을 수어(守禦)하려고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군사 전략으로 옮겨갔다.

“단순히 외적(外敵)을 막는 것만으로는 안된다? 북벌도 고려해야 한다 이 말이렸다?”

“그렇습니다. 지금 창성, 의주, 안주 등은 우리나라로서는 가장 중요한 북방 군사 요충지인데, 이곳 서북지방 방어는 전쟁 발발 시 남도의 첨방군(添防軍)을 징집하여 방어한다면 오가는데 시일이 많이 걸릴 뿐만 아니라, 지치고 훈련이 부족하여 전투력이 현저하게 약화됩니다. 그러니 현지 주민을 조달해야 합니다.”

첨방군이란 임진왜란 시 전라도 수군으로서 경상도 통영을 부방(赴防:다른 도의 군대가 참여하여 지역을 지키는 일)하는 임무를 띠고 동원되었던 군사다. 통영의 수군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니 임진왜란 이후에도 해체되지 않고 전라도 고을의 수군을 모군하여 경상도 해안 일원까지 부방하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후금의 침범을 걱정하여 서북지방을 부방토록 했다. 지계체 등 중군장이 전라도 군사를 모아 지휘했는데 가는 곳마다 전공을 쌓았다.

“전라도 군사가 용맹해서 강군이 된 것이 아니라, 민심을 샀기 때문에 민과 병이 하나가 되는 전략이 주효해서 강군이 된 것이렸다?”

그러나 정충신으로서는 굳이 전라도 군사를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모든 군사는 현지주의에 입각하여 현지 조달해야 하고, 그런 논리로 평안도는 평안도 백성이 지켜야 한다.

“첨방군은 자기 고장 해안을 지키도록 보내주고, 대신 서북 지방의 젊은이들로 평안도 군사력을 충원해야 합니다. 그들을 모집하여 농한기에 집중적으로 훈련시켜서 성을 지키도록 해야 합니다. 남도의 첨방군 대신 각도에 일천 명씩 징집하여 삼년에 한번씩 순번적으로 서북 지방에 파견 근무하도록 한다면, 진영은 훈련된 군병을 계속 얻을 수 있고, 무엇보다 공평무사한 징발로 군사운영의 효율성이 배가될 것입니다. 각 지방의 군사력 또한 향상됩니다. 전라도 첨방군만을 쓴다면 그들이 원망할 것이고, 다른 지역의 군사력은 약화될 것입니다.”

왕은 정충신의 말을 듣고 마음 속으로 흡족해마지 않았다.

“지장다운 지략이다. 군사 지휘는 전라도 지휘관을 쓰라.”

인견(引見:왕이 신하를 불러 만나는 일)이 끝나자 왕이 친히 주찬(酒饌:왕이 내리는 만찬)을 내리고, 표피(豹皮:표범 가죽)를 하사품으로 내렸다. 1625년 정월, 정충신이 험한 산악지대를 순찰돌던 도중 갑자기 쓰러졌다.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