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독립운동과 호남여성
(4)항일의 선봉에 선 전라도의 여성들
3·1운동 기점으로 항일 구국투쟁 실천 주역 떠올라
지역·계층·성별간 소통 기초해 남성 못지 않은 활약
의병에 뛰어든 양방매 동척 횡포 맞선 나주 여성 농민
나주의병 최윤룡 부인 임씨 죽음의 항거…추서안돼
목포 정명여학생들 만세운동…전원 체포돼 옥고 치러

목포정명여고생들의 만세운동 재현 모습.
올해 목포 정명여고에서 열린 만세운동 재현 행사 모습.

빼앗긴 나라의 독립을 되찾기 위한 항일투쟁의 과정에서 여성의 활약은 여성 의병, 3·1운동을 비롯해 여성농민, 노동자, 학생과 문화운동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특히 3·1운동을 기점으로 여성은 지역·계층·성별 간의 소통에 기초해 항일 구국투쟁을 실천한 주역이었고 독립운동의 전 분야에서 남성들 못지않게 활발하게 활동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독립운동의 행적을 밝힐 수 있는 기록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아 서훈된 유공자가 극히 제한적인 안타까운 현실속에서 특히 전남지역은 더욱 그렇다.

다행히 (사)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광주전남지회 발족 기념 세미나에서 이경순 전남대명예교수가 몇 건의 사례를 발표한 것은 매우 의미있는 발굴로써 이번 지면을 빌려 소개하고자 한다.

94살 때 남편 강무경 의병장의 무덤을 찾은 양방매 애국지사(1984).

양방매 지사(1890.8~1986.11)는 호남지역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후기의병장 가운데 한 사람인 강무경(姜武景)의 부인으로 남편을 따라 항일 유격전에 투신하였다. 강무경이 심남일과 함께 전남 함평에서 의병을 일으킨 뒤 1908년 영암으로 이동했을 때 평소 친분이 있던 그녀의 아버지 양덕관을 찾아 집에 유숙한 것이 인연이 된 것이다.

짧은 혼인생활도 잠시 일본군의 공세를 피하기 위해 영암을 떠나게 된 강무경이 여자가 따라나설 데가 아니라며 집에 남을 것을 권유했으나 양방매 지사는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강무경과 함께 의병이 되어 항일전에 나섰다. 이듬해 1909년 10월 9일 화순군 능주면 바람재 바윗굴에서 남편과 함께 체포될 때까지 1년 동안 의병부대의 일원으로 장흥·보성·강진·해남·광양 등지까지 전남 동남부 일대 산악지방을 무대로 유격전을 전개했다.

남편 강무경 의병장이 처형당한 뒤 양방매 지사는 스무 살 청상과부의 몸으로 의병활동을 하다 병사한 오라버니의 딸 등 친정조카를 기르며 힘들게 살다가 남편과 사별한지 74년째인 1984년에야 국립현충원에 모셔져 있는 남편을 만났다. 그로부터 2년 뒤 1986년 지사도 고인이 되었으며 2005년에서야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나주군 왕곡면 금산리 원주이씨(이회춘의 노모)로 알려진 여성농민은 동양척식회사의 토지수탈에 맞서 실랑이를 하다 일본헌병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다. 나주지방의 항일 농민운동이 세상에 알려지기는 1925년 7월 13일 동아일보에 흉악한 동양척식회사와 나주 농민토지전쟁 전말“이라는 제호 아래 천일공노할 ‘동양척식’의 죄상을 대서특필한데서 출발한다.

당시 나주들 왕곡면, 영산면, 세지면(옛명은 궁산면) 등 곳곳마다 이와 같은 유형참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반외세의 자주독립과 반봉건을 지향하면서 일제의 침략을 끝까지 막아내고자 했던 궁삼면 농민들의 토지회수투쟁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정치적, 경제적 침략에 대한 분노가 표출된 민족민중항쟁이다.

비슷한 시기 나주 다시면에 1909년 한가족 다섯분의 의병전쟁관련 순국자가 있는데, 최택현, 최윤룡, 최광현, 최병현과 최운룡의 부인 임씨가 그분들이다. 부자간이고 4촌간인 이들 남성들은 “왜적을 섬멸하지 않으면 나도 생존하지 않으리라”는 결의를 굳게 다짐하고 있었던 것이 밀고 되어 헌병에게 체포되고 총살형을 당하게 되었고, 후손들에 의해 그 내용이 밝혀져 2010년 서훈을 받았다. 그러나 남편 최운룡 등의 죽음에 한을 품고 우물에 뛰어들어 죽은 임씨에 대해서는 일제 식민폭력에 항거한 의로운 자살이라는 평가보다 유교적 윤리로만 해석되어 아직껏 추서가 되지 않고 있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
 

독립가와 격문이 발견된 정명여학교 건물, 복원된 상태로 역사관으로 되어있다.

한편 목포 정명여중에서는 1983년 2월 선교사사택이었던 근대식 석조건물의 보수작업 중에 천정에서 한 묶음의 빛바랜 자료가 발견됐다. 그것은 1921년 학생들이 만세운동에서 사용했던 격문과 독립가 원본이었다. 당시 목포 정명여학교는 독립만세운동을 두 번이나 주도했고 두 번째 만세운동에 대한 자료가 생생하게 보존되어 있었던 것이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만세운동이 목포에서는 4월8일에 일어났다. 당시 목포정명여학교는 영흥학교와 함께 목포지역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학교로 그 어느 곳보다 민족정신이 투철했다. 그리고 3·1만세운동의 민족적 열망이 채 사라지지 않고 있던 1921년 11월 정명여학교 학생들은 동아일보 등 기타 신문을 통하여 워싱턴에서 열강의 대표들이 모여 군비감축회의를 열어 만주를 비롯한 원동문제(遠東問題)를 의제로 거론한다.

이 계기를 통해 독립만세운동을 개시한다면 조선 전체의 여론을 환기시키고 워싱턴회의에 참석하는 조선인 대표자에게 성원을 주며, 또한 일반 조선인의 독립 희망이 얼마나 절실한지 각국 전권위원에게 알릴 수 있다는 정세분석 하에 여학생들은 독자적으로 만세운동을 조직하였던 것이다.
 

1983년 건물 수리 중 천장에서 발견된 독립가(왼쪽) 격문(원본, 독립기념관 소장)

“(전략) 아! 우리 동포들아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으니 때를 당하여 맹렬히 일어나 멸망의 거리로부터 자유의 낙원으로 약진하라. 동포들아 자유에 죽음이, 속박에 사는 것보다 나으리라, 맹렬히 일어나라!” -1983년 천장 공사 중 발견된 격문 ‘우리 이천만 동포에게 경고함’ 가운데
 

김귀남지사가 기미년 만세운동 때 헌신한 공로로 1949년 목포부(현 목포시)로부터 표창장.

곽희주, 김귀남, 김나열, 김복선,김옥실, 김자현, 문복금, 박복술, 박음전, 이남순, 이다애, 주유금 등의 학생들은 13일 학교 기숙사에서 국기 수십 매를 함께 제작한 뒤, 14일 오전 수업 종료 후 학생과 교사 등이 휴식 중인 정오에 오포(午砲)를 신호로 20명 모두가 국기를 손에 들고 동교 정문을 나왔다. 각자 휴대한 국기를 휘두르며 ‘조선독립만세’를 소리 높이 외치면서 학교 정문으로부터 목포부 남교동 방면으로 행진하였다. 이를 본 다른 학생들도 학교 내에 떨어져 있는 국기를 주워서 일제히 ‘조선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고 연호하면서 목포시내를 행진하다 전원 체포되었다.

체포된 이들 여학생들은 1922년 3월 11일 대구복심법원(大邱覆審法院)에서 소위 1919년 제령(制令) 제7호(政治에 관한 犯罪處罰의 件) 위반으로 각각 징역 5월에서 10월까지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뤘다.

글/명진((사)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광주전남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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