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 정권에서는 서훈 받고 싶지 않다
유달산 묏마루에 태극기 높이 꽂은 ‘김귀남’

동포들아 자유가 죽음보다 낫다
목숨을 구걸치 말고 만세 부르자
졸업장 뿌리치고 교문 밖 뛰쳐나온
열일곱 소녀

무안거리 가득 메운 피 끓는 심장소리
뉘라서 총칼 겁내 멈춰 서랴

항구의 봄바람
머지않아 불어오리니
삼천리금수강산에 불어오리니

동무들아
유달산 높은 곳에 태극기 꽂자

그 깃발 겨레 얼 깊은 곳에
영원히 펄럭이리니.

-이윤옥<서간도에 들꽃 피다> (5권) 수록-
 

김귀남 애국지사

1921년 11월14일 목포 정명여학교 학생들은 국제정치의 동향을 대한독립에 활용하기 위해 독자적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목포시내를 행진하였다. 만세운동을 주도한 12명 중 한 명인 김귀남 지사(이명 김영애)는 1904년 11월 17일 목포시 남교동 13번지에서 아버지 김윤언과 어머니 이윤옥 사이에서 일남 일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목포 북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정명여학교로 진학했으며 만세운동으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난 후 서울로 상경하여 배화여학교와 경성제일공립고등여학교를 졸업했다.

서울에서 배화여학교를 졸업 할 무렵 오빠 김영식의 친구인 서인식(당시 와세다대학 재학)과 자유 결혼하여 슬하에 서정규, 서혜경 두 남매를 두었다. 남편인 서인식이 유학 중에도 항일운동을 계속하였기 때문에 김귀남 지사도 이에 동조하여 다시 항일 독립운동에 매진하였으나 부모님의 강권으로 귀국 결국 청운의 꿈을 접어야 했다. 남편 서인식은 와세다대학 철학과 2년 수료 후, 경성제대에서 명예 철학교수로 재직 중 일경에 잡혀 중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5년 형기를 마친 뒤 석방되었다. 이후 1947~1948년 무렵 큰 형님을 뵙고자 고향인 함흥에 갔다가 남하하지 못했다.

김귀남 지사는 평생을 올곧은 철학으로 국가관이 투철한 삶을 사셨으며 본인이 독립운동 하신 것을 주변에 잘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서훈에 관한 것도 친일 정권하에서는 서훈을 받고 싶지 않다고 하셔서 돌아가신 뒤에서야 서훈 신청을 해서 1995년(1990년 작고)에 대통령표창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김귀남 지사의 사위인 문영식씨가 인터뷰한 내용을 보면 지사는 가톨릭 신앙생활에 몰두하였으며 평소에 성경, 신문, 소설 등 독서에 열중하였고 과묵하였으며, 자신의 공적을 내세우지 않아서 자녀들조차 독립운동에 대한 숨은 얘기들을 많이 듣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불의에 대해서는 단호하여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등 권위주의 정권을 향한 비판은 언제 어디서든 거침없었다고. 말년에는 딸 가족과 함께 편히 여생을 보내다가 1990년 1월 13일 13시 45분에 운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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