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490)

5부 정묘호란 1장 다시 백척간두에서 (490)

의주를 삽시간에 점령한 후금군의 기세는 산천을 집어삼킬 듯했다. 적의 1진은 사포(蛇浦:황해도 황주군 삼전리에 있는 해안포구) 방향으로 진군하고, 2진은 신미도로, 3진은 용천으로 거칠 것 없이 내달았다.

후금군은 계속 남진하면서 철산, 가도, 사포, 신미도, 용천 점령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곳은 정충신이 선사포 첨사로 근무했던 곳이었다. 철산군의 남쪽 해안에 위치한 선사포는 정충신이 직접 진영을 수축했으며, 수군첨절제사 겸 감목관(監牧官)을 배치해 군사요충지로 개발했다. 바다에는 대맹선(大猛船), 중맹선, 소맹선, 무군소맹선(無軍小猛船) 등 병선을 갖추었다. 선사포는 명나라에 보내는 조공선의 출발지라서 요충지였으며, 모문룡의 정보를 캘 수 있는 곳이었다. 이들이 서북지방 해안쪽으로 굳이 남하한 것은 잘 갖춰진 군항 접수와 가도의 모문룡을 잡기 위해서였다.

용천성 밖에서 적들은 민가에다 모조리 불을 놓았다. 용천부사 이희건은 샛강을 사이에 두고 배수의 진을 쳤다. 정월 대보름, 눈발이 휘날리더니 폭설이 내리기 시작했다. 추위에 강단이 있는 후금군이 날뛰기 좋은 날씨고, 대신 조선군은 지리멸렬해질 수밖에 없는 날씨였다. 후금군은 신짐승의 털로 옷을 해입은 반면에, 조선군은 홑적삼에 솜을 누벼서 입은 바지 정도였다. 그나마 바지가 눈에 젖으면 그야말로 물먹은 솜이 되어 몸을 움직이기가 천근만근이었다.

아민 군대의 1진 1만여명이 몰려오자 2천의 조선군은 수에 압도당해 병졸들이 겁을 먹고 도망가버렸다. 도체찰사(都體察使:전시 議政이 겸임하던 최고의 군직) 장만이 전 현감 정봉수를 방어사로 삼아 군병을 수습해 싸우도록 지휘를 맡겼다. 그러나 그도 나가자 마자 패배했다.

정월 17일 후금군이 곽산(郭山:평안도 남부 해안)의 능한산성에 진군하여 후금 장수 아민이 호령했다.

“의주는 이미 항복하고, 이완도 죽었다. 그리고 그곳의 조선군은 머리를 깎고 후금군에 배치되어 지금은 너희들의 적군으로 활약하고 있다. 너희는 어쩔 셈이냐. 살려면 투항하고 죽기로 작정하면 나의 칼을 받아라.”

성 위에서 방어선을 친 곽산군수 박유건이 되받았다.

“무슨 개소리냐. 니놈들이 끝내 치겠다면 니놈들 목을 내가 쳐서 천지신명께 바치겠다.”

그러자 이괄의 막료장 한명련의 아들 한윤이 나섰다.

“이 한윤이 드디어 아비의 원수를 갚으러 왔다. 너희는 내가 죽일 상대가 아니니 길만 비켜다오. 나는 오직 한양으로 진격하고 싶으다.”

“뭐라고 하느냐 이놈아. 너야 말로 조국을 배반한 놈으로서 이 칼이 용서치 못하리라.”

박유건이 긴 칼을 뽑아 허공에 대고 휘둘렀다.

“웃기고 있네. 우리 1만 병사와 니 군사 2천명이 싸움이 되겠느냐. 빤한 전쟁 상황을 모를 리 없는데도 까불면 한 방에 가는 수가 있어. 그러니 군말 말고 항복하라.”

“이기고 지는 것이 무엇이 중요하냐. 나라를 지키겠다는 신념이면 지고 이기고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너와 같은 간나구 새끼들 때문에 나라가 이 모양이 되었다. 강국에 빌붙어 연명하는 삶이 삶이라고 할 수 있느냐.”

“머저리 같은 놈. 니네 조정 신료들 보아라. 명나라 똥구녕 빨면서 출세길 열려고 발버둥 치는 놈이 어디 한두 놈이더냐. 대국이라면 지 마누라까지 갖다 바쳐서 한 자리 얻으려고 아양 떠는 모습 보면 한심한 새끼들이라고 생각해왔지. 지금도 니들은 물정 모르고 명나라 졸개가 되어서 권세 유지하려고 수작하고 있지 않느냐. 무지한 백성들 쥐어짜서 그 기름으로 명국에 줄을 대는 놈들, 그러니 저주받는 것이야. 백성 귀한 줄 모르고, 백성들 올라타서 착취하고 약탈하고 수탈하고, 그런 놈의 나라는 백번 배신해도 좋다, 하하하.”

“저런 쳐죽일 놈이 있나!”

이렇게 외친 사람은 정주목사 김진이었다. 그는 응원군을 편성해 곽산에 들어와 있었다. 뒤이어 선천부사 기협도 당도했다. 그러나 그들은 적의 유격전과 기마 기습전에 속수무책으로 유린되었다. 박유건과 김진은 가족들까지 생포되어 모조리 적의 화공(火攻)작전에 불에 타 죽었다. 기협은 끝까지 항전하다가 적의 칼에 목이 달아났다. 세 읍의 군사들은 모두 장렬하게 최후를 맞았다. 살아서 도망한 자도 있었으나 그 숫자는 기십 명에 불과했다.

후금군은 성 안으로 들어가 남자는 닥치는대로 칼로 베었고, 여자는 납치해 그들 군영으로 끌고 가 주린 성욕을 채웠다. 의주에 이어 곽산이 함락되니 선천, 정주도 고립되었다. 세 장수가 전사한 소식을 듣고 신임 평안병사 남이흥이 부랴부랴 전투현장으로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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