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494)

5부 정묘호란 1장 다시 백척간두에서 (494)

다급해진 아군 장수들이 논의한 끝에 성안의 집들을 모조리 태우자고 결정했다. 백성들이 난리를 쳤다.

“집을 지키라고 군사가 있는데 군사가 집부터 태우라니요?”

“작전이다. 집은 다시 지으면 된다. 집에 있는 곡식이 털리면 우리는 개털이 된다. 명령이니 어서 꼬실라라.”

불길이 이곳저곳에서 치솟아 올랐다. 이를 보고 적장 아민이 껄껄껄 웃으며 외쳤다.

“부대 하나가 쳐들어가니 저 난리군. 저것들이 작전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사람의 집이란 몸을 보호하고, 가족을 보호하고, 살림을 보호하는 소중한 재산이고, 전쟁때는 적을 피하는 엄폐물로 사용하는데 저들 스스로 불태워 없애버리는군. 불이 다 탈 때까지 기다려라. 그 다음엔 모조리 얼어죽게 될 것이다.”과연 그랬다. 왜 불 태우라고 했는지 모르지만 불타 없어진 집 곁에 있던 백성들이 정월의 세찬 추위에 발발 떨다가 병약한 자부터 쓰러져 죽었다.

안주목사 김준이 팔소매를 걷어부치며 소리쳤다.

“지엄하신 군부(君父)께서 우리에게 관직을 주시고 나라를 지키는 간성의 직책을 맡겨주었으니 마땅히 이 한 몸 던질 것이다. 조금도 두려워말고 너희는 나를 따르라.”

그러자 다른 장수가 받았다.

“맞소. 어찌 난을 당하여 구차하게 살려는 마음을 갖겠는가. 우리는 오직 죽는 것을 알 따름이며, 항복과 화친은 본래 모르는 선비들이요!”

아민은 그 정신이 놀랍다고 칭찬했다. 그러나 오로지 정신만 가지고 이길 수 있는가. 병법과 무기를 갖춘 뒤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인데, 이를 거꾸로 전술을 쓰고 있는 것이니 뭔가 잘못되었다. 다음날 새벽이 되자 안주성 사람들이 꽁꽁 얼어붙은 매서운 바람 가운데 오들오들 떨었다. 매캐한 연기와 짙은 안개로 앞을 분간할 수 없는데, 후금 군대가 소리없이 성안으로 밀어닥쳐 눈에 보이는 족족 마구 죽였다.

성의 낭떠러지로 밀리자 평안병사 남이흥과 안주목사 김준이 손에 화약 포대를 안고 성루에 기대어 적병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달려들면 화약을 터뜨려 자폭하리라. 이윽고 적의 무리들이 일시에 두 장수를 에워싸고 달려들었다. 김준이 재빨리 화약포대에 불을 지르니 집채만한 불덩어리가 확 폭발했다. 남이흥과 김준 부자와 여러 장수가 모두 몸이 사라지고, 적병도 수십 명 폭사했다.

남이흥이 폭사 직전 다급하게 쓴 혈서가 나뭇가지에 걸려 휘날리고 있었다.

-외로운 성이 포위를 당하여 형세가 매우 위태롭습니다. 이런 때 평안감사 윤훤이 군사를 이끌고 응원병으로 들어와야 하는데 구원해주지 않으니 신들은 죽을 따름이옵니다. 아, 무심한 하늘이여...

그러나 윤훤은 이미 도망가고 없었다. 안주성의 패배는 돌이킬 수 없는 참패였다. 한 병사는 “이럴 바에는 항복하고 후사를 도모해야 하는데, 이 꼴이 뭐여?” 하고 거친 숨을 내쉬다가 죽었고, 다른 병사는 “이것이 작전이여 뭐여?” 하고는 죽었다. 우후 박명룡, 강계부사 이상안, 개천군수 전상의, 증산현령 장돈, 태천현감 김양언, 맹산현감 송덕영, 영유현령 송도남, 박천군수 윤혜, 북영장 한덕문 등이 이 전쟁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

안주를 치자 평양은 군마로 한나절 달리면 당도할 거리에 있었다. 벌써 평양 백성들은 안주가 도륙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동요하더니 거리마다 울부짖으며 피난 행렬이 줄을 이었다. 평양감사도 대비하지 않고 미리 도망을 가버렸는데, 백성들은 지휘자 없이 각자도생해야 하는 것이었다. 황해병사 정호서도 평양성 함락 소식을 듣고 가솔을 이끌고 황주를 벗어났다.

조정이 놀라서 갈팡질팡하는 사이 왕실은 윤훤 대신 신경원을 평양감사로 임명하고, 전사한 남이흥 대신 신경원을 평안병사로, 이익을 정호서 대신 황해병사로 각각 임명해 방어책을 강구했다. 평양성이 적중에 떨어졌다는 것은 사실상 망국을 당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평양은 한양 못지 않게 큰 도시였고, 조선에 비중있는 상징도시였다.

조정에서는 긴장하는 가운데 피난하자는 의사가 결정되었다. 임금이 한양을 비울 것에 대비해 김상용을 유도대장에, 여인길을 부장으로 삼아 한양을 지키도록 했다. 이런 난리 속에 중군장 지계체가 어전에 당도해 엎드려 고했다.

“나리 어른, 도망만 간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옵니다. 난리를 구해야 하는데, 구할 사람은 정충신 장군 뿐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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