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독립운동과 호남여성
(5)김흥은·신경애·장매성의 삶
학생들 민족의식 고취로 광주학생독립운동 전국화 뒷받침

김-정신여고 재학중 만세운동 참여… 야학서 여성 계몽도
학생독립운동 발발하자 주먹밥·음료수 지원… 부상자 치료

신-경기 출신으로 ‘일제 맞서겠다’며 미국 유학 권유 거절
강용석과 결혼 후 서울-광주·전남 오가며 종횡무진 독립운동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 전국으로 파급된 뒷면에는 김홍은, 신경애, 장매성, 최순덕, 김두채, 박기옥, 이광춘, 강사채 등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숨은 활동이 있었다. 사진은 최근 항일독립운동가 김홍은, 신경애, 김두채 강사채, 최순덕 선생의 자녀들이 손예빈 작가 주선으로 한 자리에 모인 모습. 맨 오른쪽은 손예빈 작가.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 전국으로 파급된 뒷면에는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숨은 활약이 있었다. 김홍은, 신경애, 장매성, 최순덕, 김두채, 박기옥, 이광춘, 강사채가 그들이다. 먼저 학생독립운동 당시 여학생들의 독립운동 활동에 큰 영향을 끼친 김홍은, 신경애, 장매성의 삶의 궤적을 살펴보자. 그들은 어떠한 성장배경과 가르침으로 항일투쟁에 나서게 되었을까.
 

아버지 강해석의 사진을 들고 있는 강연파 여사.
어머니 김홍은의 사진을 들고 있는 강연파 여사.

▶학생독립운동의 숨은 활동가

김홍은(1903~1963)은 원산과 목포 총순이었던 김윤수의 차녀로 목포에서 태어났다. 총순과 양조장 사업을 하며 부와 권력을 거머쥐고 살았던 김윤수는 기독교에 귀의한 후 두 직업을 모두 버리고 농사를 지으며 민족계몽운동에 헌신했다. 1904년 광주로 이주해 온 부친이 유진벨 선교사와 함께 양림리에 교회를 개척하자 언니 김명은과 함께 수피아여학교에 다녔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했던 부친 김윤수의 가르침을 받은 김홍은은 수피아여학교 졸업 후 정신여고에 다니던 중 삼일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소비자조합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김홍은은 소비자협동조합운동을 일으켜 거대자본으로 조선의 상권을 장악하려는 일본 상인들과 대항했다. 독립운동가 강해석과 혼인한 김홍은은 남편과 함께 광주지역 학생들을 지도했고 광주여성청년동맹 대표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에 힘썼다. 유치원 교사를 했던 김홍은은 저녁에는 야학교 교사로 봉사하며 지역여성들이 주체적인 여성으로 살 수 있도록 도왔다.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대규모 학생시위가 일어나자 광주여고보와 수피아여학교 학생들과 힘을 모아 주먹밥, 음료수 등을 지원하고 부상 학생 치료를 위한 의료품을 보급하며 학생독립운동을 적극 도왔다.

김홍은이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거부하자 일제는 김홍은을 경찰서에 끌고 가 고문을 가하고 감옥에 가뒀다. 그러나 김홍은은 끝까지 일제의 협박과 강요에 굴하지 않았다. 김홍은의 막내딸 강광파는 소비자조합운동을 했던 어머니의 대를 이어 소비자를 위한 시민의 모임에서 중요 활동을 했다.
 

신경애 항일독립운동가.
일제 경찰에 체포된 항일독립운동가 신경애 선생 모습.

신경애(1907~1964)는 경기도 개풍의 부유한 한의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개성 호수돈여고에 들어간 신경애는 3.1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호수돈여고 선배들로부터 애국애족정신을 보고 배우며 자랐다. 졸업 후 미국 대학에 가서 공부하라는 가톨릭신부의 제안에 신경애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일제의 폭압에 시달리는 동포를 구하는 게 더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라고 하며 제주도로 내려갔다. 미신과 문맹으로 어둠속에 살고 있는 섬 지역 여성들에게 글과 셈법 등 기본적인 지식을 가르쳐주며 주체적인 여성으로 살아 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일제는 그러한 그녀를 가만두지 않고 매번 경찰서에 끌고 가 고문을 가하곤 했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야 했기에 신경애는 이화여전에 입학해 조용히 공부하는 학생으로 위장하고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항일독립운동가 신경애 선생이 갇혔던 서대문 형무소.
어머니 신경애 선생 사진을 들고 있는 딸 강명성 여사와 강인홍 여사.

1927년 2월 신간회가 설립되고 1927년 5월 27일 신간회 자매회인 근우회가 창립되자 신경애는 근우회 광주지회장으로 활동했다. 광주 수기동 출신 강영석과 혼인한 신경애는 1928년 담양 전남청년동맹 여성부대표, 1929년 광주전남청년동맹 집행위원으로도 위촉되어 서울과 광주전남을 오가며 종횡무진 독립운동 활동을 펼쳤다.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대규모 학생시위가 일어나자 광주와 서울 등지의 여학교에 다니는 여학생들이 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하도록 독려하며 조국독립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힘썼다.

1930년대 노동절 투쟁을 이끌다 신경애는 수시로 경찰서에 끌려갔다. 일제는 남편과 동지들의 행적을 대라고 협박하며 사망 직전까지 가는 고문을 가했다. 신경애는 물고문으로 허파가 터지고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극한 고통을 겪어도 일제의 협박에 일체 응하지 않았다. 신경애가 극심한 고문으로 사망 직전에 이르러야 일제는 풀어주곤 했는데 그럴 때면 한의사인 부친과 광주의 부호였던 시아버지 강호일 선생이 온갖 좋은 약과 병원 치료를 해주어 살려내곤 했다고 후손들은 증언한다.

1940년 일본 경찰에게 극한 고문을 당해 사경을 헤매고 있는 넷째 며느리 신경애를 살리고자 강호일 선생은 일본에 있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해주었다. 그때 일본에서 낳은 딸이 강화성(1941~ ), 강명성(1943~ )이다.

“일경들에게 받은 고문후유증으로 어머니는 똑바르게 걷지를 못했어요. 극심한 통증이 전신에 가해오면 고통을 참을 수 없어 온 방을 기어 다니며 고통스러워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병고에 시달리며 살아야했지요......”

돌아가신 어머니 신경애를 그리며 강영석, 신경애의 딸 강화성과 강명성 그리고 막내딸 강인홍은 눈물을 머금고 증언했다.

정부는 신경애의 독립운동 활동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글/손예빈 작가

손예빈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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