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495)
5부 정묘호란 1장 다시 백척간두에서 (495

궁궐은 피난 준비에 경황이 없었다. 그래서 지계체의 말을 주의깊게 듣는 사람은 없었다. 궁궐 앞 마당에 엎드린 지계체가 다시 외쳤다.

“후금군을 격퇴할 인물은 정충신 장수 뿐이옵니다. 난리에는 정충신 장수 뿐이옵니다. 그를 출진시켜 주십시오. 한 시가 급합니다!”

마침 궁궐로 들어오던 이귀가 지계체를 보았다. 그의 군장과 어깨에 부착된 계급장을 보더니 버럭 화를 냈다.

“이놈! 여기가 어디라고 중군장 따위가 감히 궁궐 앞에 와서 소란을 피우느냐?”

“나리, 후금의 사정과 우리나라 서북 형편을 잘 아는 사람이 정충신 장수이옵니다. 오랑캐가 쳐둘어왔는즉, 백척간두의 나라를 구할 사람은 정충신 장수 뿐이옵니다. 빨리 전선에 투입해야 하옵니다.”

“정충신? 그러면 네가 정충신의 막료렸다? 지금 정 공은 편찮다고 하지 않더냐. 토질병으로 병상에 누워있다고 하던데?”

“그럼 제가 가서 아뢰겠습니다.”

“정 공의 막료라면서 그것도 모르고 왔었더란 말이냐? 진실로 네가 정 공 휘하에 있었단 것이 사실이냐?”

“소인은 전라도 군사입니다. 전라도 군사로 안현전투에 참가하여 정 장수의 휘하에서 싸웠습니다. 잔병들은 원대 복귀하였으나 소인은 정 장수의 눈에 들어 압록강변까지 따가갔나이다. 추위가 엄습하는 전선을 시찰하던 중 정장수가 풍을 맞아 후송되었습니다. 정장수가 빠지자 전선이 오합지졸이 되어 밟히고 있습니다. 정 장수가 아니면 수습할 수 없다 하여 불원천리하고 소인이 달려왔나이다.”

이귀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그래? 지금 정 공은 인왕산 밑 누옥에서 치료중이다. 내일 뫼시고 나오거라.”

이귀는 어전으로 들어가고, 지계체는 급히 광화문 앞뜰을 지나 영은문 밖으로 나왔다.

궁궐은 여전히 어수선하기만 했다. 좌의정 윤방이 잰 걸음으로 상감 앞에 다가와 엎드렸다.

“마마, 적군이 평양성을 점령하고 황주, 송도까지 내려온 듯합니다. 서둘러야겠습니다.”

“어떻게 서두른단 말이오?”

“피난을 떠나셔야 합니다.”

“내가 떠나야 한다고 원통한 일이로고. 종묘 사직을 어떻게 두고 떠난단 말이오.”

“묘사주(廟社主:종묘와 사직의 부표)를 모시고 가야지요.”

‘그렇다면 그리하도록 하시오. 자전(慈殿:왕의 어머니)부터 먼저 강화도로 떠나시게 하고, 우상 오윤겸이 묘사주와 자전을 배행토록 하시오.”

“마마께옵서 옥체 이동이 더 급박하옵니다.”

“그래두 순서가 있는 법, 영상이 분조를 구성해야 한다고 했소. 그것을 논의해야 하오.”

분조는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로 피난갈 때 광해에게 권력을 맡겨 내치를 이끌고, 왜란을 극복하도록 조치해서 성공을 거둔 제도였다.

“그러면 소현세자 마마께 분조를 맡긴다는 것이옵니까?”

“그래야지요. 빨리 어전회의를 소집하시오.”

이윽고 어전회의가 열렸다. 소현세자 분조에 대해선 이견이 없었으나 분조를 어디다 설치해야 하는지를 놓고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분조를 북쪽에 설치하도록 합시다. 당당하게 말이오이다.”

“안되오이다. 북쪽은 오랑캐에게 유린당했는데 그곳으로 가라는 것은 호랑이 입에 고깃덩어리를 넣는 것과 같소.”

“그러면 경주 쪽으로 갑시다.”

“그건 더욱 말이 안되오이다.”

“왜 그렇소이까?”

“임진왜란 시 맨먼저 뚫린 곳이 영남지방이오. 그리고 지금 그곳은 왜색이 짙어졌소. 그곳에 분조를 설치하면 왜놈들에게 포박당할 수 있소. 분조를 설치하려면 종묘사직의 뿌리인 전주로 가야지요.”

“옳소. 그곳은 왜구나 오랑캐에게 쉽게 밟히는 곳이 아니오. 전주로 말할 것 같으면 조선왕조의 뿌리요. 우리들 정신적 고향아오,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긍지가 높은 곳이오. 백성들이 외세에게 땅 한 뼘 내놓지 않는 자부심이 강한 고을이오. 왕통을 잇고, 백성들의 사기가 높은 전주로 분조를 옮기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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