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독립운동과 호남여성
(6·끝)최순덕 이광춘 김두채 박기옥 강사채
일경 피해 광주학생독립운동 전국 파급 주역들
비밀편지 전달·백지동맹 주도 등 헌신적 활동
민족정신 정의감 남달라…퇴학도 두려워 안해

광주에서 일어난 학생독립운동이 전국으로 파급되기까지에는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숨은 활약이 있었다. 최순덕, 이광춘, 김두채, 박기옥, 강사채 등은 평범하고 앳된 여학생으로 보였기에 일경들의 감시망을 피해 남성 동지들의 활동을 남모르게 도울 수 있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광주여고보 정구부 회원들.
지난해 10월 광주에 모인 김두채, 강사채, 최순덕, 김홍은, 신경애 선생님의 후손들.

김두채(1912~1947)는 1927년 10월 창립된 광주소년동맹에서 소년단원으로 활동하며 민족의식을 깨쳐나갔고 광주여고보 재학 당시 백지동맹과 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하여 퇴학을 당했다. 수피아여학교로 전학을 간 김두채는 졸업 후 광주소년동맹위원장이었던 강석원과 혼인했다. 그러나 독립운동하는 남편 강석원과의 결혼생활은 평탄하지 않았다. 일경은 김두채를 수시로 경찰서로 끌고 가 독립운동하는 남편과 동지들의 행적을 대라고 협박과 고문을 가했지만 김두채는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을 거부했던 항일여성 김두채는 모진 세상의 풍파를 견디다 36세에 눈을 감았다.

정부는 김두채의 항일투쟁 활동을 기리어 2019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모친이신 최순덕선생님의 사진이 있는 책을 들고 있는 이재민 교수.

나주에서 정미소를 운영했던 부친의 격려와 사랑을 받으며 자랐던 이광춘(1914~2010)은 활달하고 진취적인 여학생이었다.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일본인 중학생이 당시 광주여고보에 재학 중이던 이광춘과 박기옥, 이금자를 희롱했고 이광춘 등은 강하게 항의하며 일본중학생들을 질책했다. 이로써 심화된 광주고보생과 광주중학생간의 갈등은 11월 3일 광주역에서의 대규모 충돌로 이어졌다.

광주학생 운동의 도화선의 한사람이었던 이광춘은 11월 3일 광주지역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위운동이 전개되자, 솔선하여 광주여고보 학생들을 주도하여 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일경에 붙잡혀 가혹한 고문을 받고 석방되었다.

그 후 방학이 끝나고 새학기가 시작되면서 광주학생들의 시위는 다시 추진되었고 이광춘은 광주여고보를 중심으로 다시 학생시위 계획을 준비해 갔다.

그리하여 1930년 1월 13일 시험시간 중, 돌연 교단으로 뛰어 올라가 붙잡힌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험을 거부하자는 백지동맹을 주도해 갔다. 그는 이 일로 학교에서 퇴학처분을 받고 일경에 붙잡혀 갖은 고초를 겪었다.

정부에서는 이광춘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모친 김두채선생의 사진을 들고 있는 딸 강은파 씨와 아들 강태진씨.

강사채(1915~1999)는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면 수기옥정에서 태어났다. 넷째 오빠 강석원이 이끄는 광주소년연맹에서 활동했던 강사채는 어린 소녀시절부터 민족의식이 강했다. 그는 독립운동하는 오빠들의 비밀편지를 동지들에게 전달하는 연락책 역할을 했다. 10대 초반의 앳된 소녀였지만 영민하고 대범했던 강사채는 일경의 감시를 피해 오빠들의 심부름을 척척 해내곤 했다.

강사채는 광주여고보 1학년 재학 당시 15세라는 어린 여학생으로 백지동맹과 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하여 퇴학을 당했다. 정부는 강사채의 항일투쟁 활동을 기리어 2019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1959년 11월 3일에 전남여고본관 앞에 제막된 광주학생독립운동여학도기념비 앞에서 전남여고 동문들이 찍은 사진/서용좌씨 제공

박기옥(1913~1947)은 전라남도 나주군 나주면 금정31에서 태어났다. 나주역에서 통학열차를 타고 광주여고보에 다녔던 박기옥은 3·1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사촌오빠 박준삼의 영향을 받아 민족의식이 남달리 강했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일본 중학생들이 당시 광주여고보에 재학 중이던 이광춘과 박기옥, 이금자를 희롱했다. 이에 박기옥 등은 일본중학생들에게 강하게 항의하며 질책했고 이를 본 박기옥의 사촌동생 박준채는 후쿠다 등 일본학생들에게 사과를 요구했다. 그러나 후쿠다가 조선인 주제에 사과를 요구한다고 대꾸하자 이에 격분한 박준채와 광주고보생들은 일본중학생들과 격투를 벌이게 되었다. 이를 본 일본 경찰들이 일본인 학생 편을 들자 광주고보 학생들은?편파적인 판별에 대해 집단항의하였다. 이 사건으로 박기옥은 3개월 동안 감옥에 갇히고 퇴학을 당했으며 2년 동안 가택연금을 당했다. (박기옥 딸 서정이 증언). 수년에 걸쳐 일어난 한일학생간 갈등과 싸움은 화산 터지듯 터져 1929년 11월 3일 광주역에서 대규모 충돌로 폭발했다. 그 날 오후 광주고보(현 광주제일고)와 광주농업학교(현 광주자연과학고), 광주사범학교(현 광주교대), 광주여고보(현 전남여고) 중심으로 대규모 학생 시위가 일어났다. 2019년 정부는 박기옥의 공훈을 기리어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손예빈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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