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덕과 문남식
최-광주여고보 재학중 백지동맹 주도
문-제자에게 민족혼 심어주다 강제해직

문남식과 최순덕이 함께 찍은 사진. 맨왼쪽이 문남식, 맨오른쪽은 최순덕.

최순덕(1911~ 2013)은 광주 사동에서 태어났다.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현 전남여고) 3학년 재학 중 급장이었던 최순덕은 백지동맹을 주도했다. 백지동맹 호소문을 품에 숨기고 당시 급우 박지의 집에 찾아간 최순덕은 박지와 함께 밤을 새워 백지동맹 호소문 150여 장을 직접 수기로 썼다.

이튿날 최순덕은 학교로 가서 학우들에게 백지동맹 호소문을 나눠주었다. 각 교실마다 다니며 칠판에 한 글자도 쓰지 말자는 호소문을 썼다. 그러자 학생들이 모두 일어나 운동장으로 나갔다. 운동장에는 1학년부터 3학년까지 전교생이 모두 모여 식민지노예교육을 철폐하라는 구호와 구속학생을 풀어주라는 구호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이후 최순덕은 1930년 1월에 퇴학을 당했다.

문남식선생은 광주여고보 교사로 재직 당시 백지동맹 주도자였던 최순덕이 일경의 감시를 피해 급우의 집에 숨어살게 되자 위험을 무릎 쓰고 최순덕을 찾아가 위로와 격려를 해주었다. 문남식 선생은 광주여고보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었다는 이유로 강제해직을 당했다.

상경하여 숙명여고 교사로 재직했던 그는 해방 후 서울의 교장들과 함께 전남여고에 광주학생독립운동 여학도기념비를 건립하기로 뜻을 모았다. 교통편이 원활하지 않았던 1950년대 당시 서울의 6개교 교장들은 발로 뛰며 전국 각 시도 중·고등학교에 연락하였는데, 이에 호응한 교사와 학생들의 모금이 이루어졌고 특히 제주도와 경상남북도, 강원도 오지의 작은 중·고등학교에서도 모금을 하여 보내주었다. 이는 당시 광주학생독립운동에 대하여 전 국민의 호응과 관심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전국 1128개교가 모금에참여하여 195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 여학도기념비가 전남여고 본관 앞에 세워져, 6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학생독립운동의 상징물로서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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