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508)

제6부 팔도부원수 1장 모문룡을 부수다(508)

“네이!”

창과 검을 든 군사들이 정충신의 말뜻을 알아차리고 한결같이 외쳤다. 군사들이 각 고을로 퍼져나가 왈패들을 저인망으로 훑듯이 잡아들였다. 자그마치 숫자가 120명이 넘었다. 그중에는 기녀와 창기도 열댓 명 끼어있었다.

“뜰로 집합시키라.”

건달패들이 포승에 포박당한 채 모두 뜰로 끌려나왔다. 정충신이 단에 올라 군교들에게 명령했다.

“저자들 포박한 끈을 모두 풀어라.”

아니, 체포된 자들을 풀어준다고? 군교들이 놀랐으나 그보다 왈패들이 더 놀라고 있었다. 풀면 도망갈 자가 나올텐데 뭘 믿고 풀어주나? 그러나 정충신의 명이 워낙 완강한지라 군교들이 묵묵히 포승을 풀었다.

“너희들은 이제 신체의 자유를 얻었다. 도망가고 싶은 자는 지금 나가도 좋다.”

그러나 도망가는 자는 없었다. 그들은 어느새 정충신의 권위에 압도당했다.

“듣자 하니 너희들은 도박과 밀수, 싸전의 독점권을 따내 경제질서를 어지럽혔다. 인삼 한 뿌리, 깨 한 됫박을 가지고 열배로 튀겨먹었다. 여자들을 끌어들여 매음을 시키고 돈을 가로챘다. 그것이 사실이렸다?”

아무도 대꾸한 자가 없었다.

“사실 나도 그런 자를 내 막료로 둔 적이 있다. 명장 소리를 듣는 김막돌 중군장이다.”

그러자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김막돌 중군장은 행주성 싸움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그도 나라를 위해 훌륭한 일을 했다. 그가 전사하면서 간곡하게 나라를 지켜달라고 유언을 남겼는데, 그것을 지키려고 여기까지 왔다. 또 어떤 소녀가 있었다. 5년 동안 건달패의 강압 아래 수많은 남자와 성관계를 맺은 소녀다. 그의 몸에는 남자들이 스쳐간 숫자를 문신으로 새겼는데 800이 넘었다.”

장내가 잠시 웅성거리다 조용해졌다.

“유년기를 거쳐 15살의 나이에 성 노예로 팔렸다. 인신매매범들이 바로 왈패들이다. 여자들을 전리품 마냥 취급하면서 훔치고 몸을 팔고, 때로는 살인에 가담시켰다. 그들을 나라가 지켜주지 못했으니 나라도 할 말이 없다. 나라는 왜놈에게 도륙당하고, 북방 오랑캐에게 짓밟혔으니 여력이 없었다. 여력이 있었다 해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나라가 그러니 어떤 개인도 보호받지 못했다. 개인의 팔자는 민족의 운명을 앞서지 못하는 것이니 백성마다 이렇게 비참하게 유린당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나라 구할 생각은 않고 투전판, 매음굴, 청부살인으로 살겠다고 하는 것이냐?”

이런 훈계는 생전 처음 들어본다. 그들을 나라의 일원으로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로부터도 사람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는데, 나라의 일원이라고 하니 슬며시 자존감이 생기기까지 한다.

“너희들은 모두 한때는 귀여운 아들과 딸이었을 것이다. 세상을 잘못만나서 이렇게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사는데, 그러나 세상 탓만 하겠느냐? 나라가 너희를 부른다. 타락할 틈이 없다.”

그때 이마에 솜털이 보송보송한 소녀가 쓰러지더니 울부짖기 시작했다.

“소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저의 아비는 신자, 관자, 옥자이옵니다. 그런데 국사범으로 몰려서 혜산진으로 귀양을 갔사온데 귀양살이 동안에도 아비를 죽이겠다는 반대파들이 자객을 데리고 혜산진으로 찾아갔나이다. 아비가 그들을 물리쳤습니다. 그런데 군수 나리가 아비를 붙잡아다가 살인 혐의로 국문하고는, 며칠 뒤 죄를 사해주는 대가로 어미와 저를 첩실로 데려갔나이다. 아비는 해배되어 집으로 갔으나 소녀와 어미는 이미 고을 나리의 첩실로 옮겨갔고, 아비가 항의하러 갔다가 음모와 비계(?計)를 꾸몄다 하여 끝내 효수되었나이다. 어미와 소녀가 함께 배태하자 어미가 저더러 도망가라 하고 자진하였나이다. 소녀는 야반도주하여 산으로 도망을 갔는데 당도한 곳이 산적의 소굴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몸을 파는 신세가 되었나이다.”

정충신이 생각하더니 물었다.

“그러면 배태한 아이는 어떻게 되었는고?”

“밤마다 남자들에게 시달리다가 지워졌나이다.”

정충신은 한동안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인간에 대한 절망이 뼈아프게 흉중에 닿았다.

“참혹한 무고로 아비가 죽고, 어미와 딸이 함께 세도가의 첩실이 되었다. 이런 세월을 살아온 소녀에게 연민이 가지 않느냐? 인간으로서 측은지심이라는 것이 있는데, 없더란 말이냐? 저런 억울한 소녀를 창기로 내몰았던 것이냐? 정년 수오지심이란 것이 없더란 말이냐? 그건 배우고 안배우고와는 상관이 없다.” 하나둘씩 건달들이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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