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발견
<1>해남윤씨 어초은파 어초은종가와 녹우당

시루떡에 실타래와 수저 꼽고 무탈 기원
윤두서 자화상은 국보, 윤고산 관계문서는 보물
해남 완도 진도 간척으로 큰 부자 가문 일으켜
세번 납세대납으로 옥문열어 백성 구휼

한류가 세계무대에서 인기다. 이제 종가문화가 한류 새시대를 열 때가 되었다. 종가문화유산을 유네스코 보존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백여개의 전남종가가 뛴다. 양재혁 총무(담양 소쇄원장)는 “학계와 연계, 유네스코 등재 학술대회를 계속하고, 종가유산의 가치를 체험하도록 구례 운조루, 영광 매간당, 나주 남파고택 등을 개방할 예정이다.”고 밝혔다. 종가에는 역사인물, 사건, 스토리, 종가음식, 종택건축, 정원 등 유무형 콘텐츠도 많다. 한류의 보물창고인 대표 종가 보유의 유산을 살펴, 변화하는 종가문화를 재조명한다.

녹우당을 설명하는 윤형식 전남종가회장(해남윤씨 종손), 옥동 이서가 절친 윤두서에게 써 준 현판으로, 신록의 대지에 성장 자양분을 주는 푸른 비를 표현함. 건물은 효종이 스승 윤선도에게 하사한 집을 1668년 배로 옮겨 지은 사랑채.

<1> 녹우당 세시풍속과 해남윤씨 종가유산

정월 초하루부터 사흘간 수많은 손님이 녹우당을 찾아 세배를 나눈다. 손님맞이 음식으로 차려진 비자강정·어만두·육만두가 독특하다. 차례음식은 5탕5찜을 기본으로 상어포에 도라지 나물 3채와 과일, 직접담은 청주 또는 비파주를 놓고 떡국을 올린다.

녹우당 세시풍속에는 종부 모성애로 집안 곳곳에서 고사를 지낸다. 종손과 종부가 팥시루떡 위에 실타래를 올리고, 수저를 꼽아 무탈과 무병을 기원한다. 사당, 우물, 은행나무, 대청에 각각 계란에 동백기름 넣고 불을 켜 놓으며 가족 안위를 기원한다. 수 백년 동안 종부를 통해 이어져 내려온 이 전통은 한국전쟁 때도 거르지 않을 정도로 정성을 다한다.

해남윤씨 어초은파 어초은종가에서는 국가보물이 즐비해 세시풍속처럼 모든 유산을 잘 보존하려 한다.

윤선도 문헌 ‘윤고산 수적 관계문서’는 보물 제482호, 유일한 고려시대 노비문서 ‘지정14년 노비문서’도 보물 제483호다. 305매 목판 ‘고산유고 목판일괄’은 유형문화재 제219호다. 경기도에서 옮긴 사랑채가 있는 종택 ‘녹우당’이 사적 제167호다. 유훈 지켜 보호한 ‘비자나무숲’은 천연기념물 제241호다.

보길도 부용동 세심정

‘보길도 윤선도 유적’은 사적 제368호, 백포마을의 윤두서 고택은 중요민속자료 제232호다. 이런 공간과 전통건축이 가능했던 것은 세번을 대납하고 옥문을 열어 백성을 구휼했기 때문이다.

윤선도의 증손자 윤두서의 ‘자화상’은 국보다. 보물인 ‘해남윤씨 가전 고화첩’외에도 고문서 2천500점과 전적 3천권 등 기록유산들이 가치있는 유산이다.

규방가사, 설화집 등이 스토리를 전하고, 장어구이 추어탕 계절음식이 전승되는 해남 윤씨가의 부는 어떻게 일어났을까? 윤선도의 조부 윤의중 때부터 장흥 등 서남해안 간척으로 부자가 되었다. 그 중 가장 큰 백포를 관리하는 가옥(윤두서 고택) 18칸은 지금까지 잘 보존돼 있어 그 시대의 건축을 잘 보여준다. 비교되는 민간 건축으로 전국 최대 종택인 영광 연안김씨 매간당은 116칸이 보존되어 종가 체험을 기다리고 있다.
 

민간 소유 전통한옥으로 전국 최대인 영광 연안김씨 종택 매간당

윤선도는 노화도 석중마을 앞을 간척해 60정보, 진도 임회면 굴포리에 200정보 가량을 간척했으니 보길도 부용동이나 현산면 금쇄동에 원림을 조성하는 것은 해남윤씨가의 강성한 경제력이면 어렵지 않았다. 3년상을 마친 윤선도의 자녀들이 합의로 노비 등의 재산을 분할한 분재 기록에 따르면 경기도 파주, 황해도, 충청도 등지의 재산은 사위들에게, 종가 인근 재산과 노비는 아들들에게 분배한 것으로 규모를 짐작케 한다.

보길도 세연정 앞 연못 세연지

보길도 세연정의 관람객 중에는 풍광과 기술 규모 등에 놀라면서도 그시절 윤선도가 누렸던 풍류가 수많은 노비의 피눈물에 기대었을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만약 노비 백성의 진심을 얻지 않은 나쁜 영감이었다면, 호란 의병을 거병했을 때나, 나라 잃은 소식에 제주로 가는 도중에 흩어졌을 것이다. 결국 고산의 풍류는 과유불급 군자의 도를 실천하는 선비다운 품격의 풍류였다는 논리가 합당하다.

윤선도의 ‘충헌공 가훈’은 아들에게 쓴 편지 형식이다. 종가관리, 재산분배, 노비관리, 검소한 생활과 예절 등을 기록했다. 수신(修身)과 근행(勤行)으로 적선(積善)하고 인자한 행실(仁行)을 제일의 급선무로 여겨야 한다고 했다.

편지는 “첫째 , 의복 등 몸을 받드는 것들 모두 구습을 고치고 폐단을 살펴라. 음식은 굶주림을 채우는데 그치고 의복은 몸을 가리는데서 취하며, 그릇은 적당히 쓸 것에서 취하는 것이 옳다.…(생략) 일곱째 ,‘소학’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본보기가 되게 하니 이를 위주로 해야 한다. 여덟째, 가문의 흥성 멸망이 이 한 장의 종이에 있으니 절대 범연히 보아 넘기지 말거라. ”는 가훈을 담았고 대대로 따랐다.

문학과 의학·건축·경제를 망라한 학식으로 선비정신을 실천하려 했던 윤선도 선생이 꿈꾸는 사회가 궁금해 종가체험 녹우당 프로그램이 열리기를 기다린다.
/서정현 뉴미디어본부장 sjh@namdonews.com

보길도 곡수당과 연지 사이 다리는 학관이 부친 윤선도에게 하루세번 문안하기 위해 건넜다는 일삼교(日三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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