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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기생충’ 가장 외롭고 고독할 때의 기록
기생충 각본집 & 스토리보드북 세트

‘기생충’ 가장 외롭고 고독할 때의 기록

봉준호 감독이 직접 쓰고 그린
‘기생충의 계획’ 생생하게 담겨

창작 과정·영화 세계 묻는
심도 깊은 인터뷰까지 수록
문광·기택 작명 배경 등도
잘려나간 미공개 씬은 보너스

■기생충 각본집 & 스토리보드북 세트
봉준호, 한진원, 김대환, 이다혜 지음
플레인/3만7천원

기생충 각본집
 

“말이 안 나온다.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이 벌어지니까 너무 기쁘다. 지금, 이 순간 굉장히 의미 있고 상징적인 시의적절한 역사가 쓰이는 기분이 든다.”

영화 ‘기생충’ 제작자 곽신애 바른손 E&A 대표가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고 권위인 작품상을 수상한 뒤 시상식 무대에서 한 소감이다. 곽 대표의 표현처럼 기생충은 올해 아카데미상 작품상을 비롯 감독상, 각본상, 국제영화상 등 4개의 아카데미 트로피(오스카상)을 거머쥐었다. 한국영화는 물론 세계영화사에 커다란 획을 긋는 대사건이었다.

‘기생충’의 아카데미상 수상으로 이 영화를 연출한 봉준호 감독이 지난해 9월 출간한 ‘기생충’ 각본집 & 스토리보드북 세트가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봉 감독이 직접 쓴 각본과 직접 구성한 스토리보드 외에 봉 감독의 창작 과정과 영화 세계를 묻는 인터뷰가 담겨있는 이 각본집 세트는 아카데미상 수상 소식이 전해진 뒤 불티나게 판매될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기생충’의 각본과 스토리보드는 봉 감독이 직접 쓰고 그렸다는 점에서 더욱 특별하다.

각본은 그 자체로도 흥미로운 읽을거리다. 봉 감독의 전매특허와도 같은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 허를 찌르는 상상력, 코미디와 스릴러, 호러 등 각종 장르가 버무려져 보는 이를 단숨에 몰입시키는 충격적인 재미를 선사한다. 영화에서는 아쉽게 편집되어 만나볼 수 없는 미공개 씬도 보너스처럼 들어있다.

각본집에는 봉 감독의 인터뷰도 실려있다. 영화전문기자이자 작가인 이다혜 씨네21 기자가 진행한 이 인터뷰에는 ‘각본’이라는 문학적 장르와 ‘글 쓰는 사람 봉준호’에 초점을 맞춰, 새로운 각도에서 그의 영화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다.

또 문광·기택 극중 배우들이 이름 어떻게 지었나 등 영화 뒷이야기도 재미를 준다. 송강호가 연기한 ‘기택’은 정치인 이기택을 떠올리고 지었고, 충숙은 태릉선수촌 라커룸에 붙었을 법한 이름이라생각했다고 한다. 지하남 ‘근세’는 갑근세에서 따왔고, 건축가 ‘남궁현자’는 화면에 나오지 않으면서 캐릭터를 각인시키기 위해 특이한 이름으로 지었다.

어린 시절 만화가를 꿈꿀 만큼 만화광이었고, 대학 시절 학보에 만평을 연재하기도 했던 봉 감독은 영화의 스토리보드를 전문 작가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그리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아직 봉준호란 감독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던 ‘기생충’이 어떻게 봉준호 자신에 의해 종이 위의 스케치가 되어 영화의 뼈대가 되었는지, 스태프와 배우들이 영화에 살을 붙이기 직전 단계의 ‘기생충’은 어떤모습이었는 지를 스토리보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봉 감독은 대본집 서문에서 과거에 “제 영화는 제가 그린 스토리보드와 거의 다를 바가 없습니다”라고 뽐냈던 것이 ‘한심하기 그지없는 자랑’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스토리보드를 펼치고 몇 페이지만 넘기면 그것은 ‘자랑’이 아니라 오히려 겸손에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된다.

구도나 카메라 워킹, 동선은 물론 매 씬마다 무서울 정도로 정교하다. 치밀한 연기와 연출 방향, 감독의 고민까지 섬세하게 담겨있어 대본과 스토리보드를 읽기만 해도 거의 완성된 영화를 본 것처럼 머릿속에 이미지가 그려진다. ‘봉 감독이 이렇게 만화를 잘 그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만큼 등장인물도 생동감이 넘친다. 이같은 이미지 위에 배우들의 생생한 몸짓과 스태프들의 오랜 경험, 봉 감독의 연출이 더해져 한국영화사 100년을 다시 쓸 영화 ‘기생충’ 이 탄생한 것이다.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시나리오를 쓰고, 스토리보드를 그리고, 촬영을 하고, 편집과 녹음을 한다. 이 단계들을 꾸준히 일곱 번 반복한 것이 지난 20년간 나의 삶의 전부다. 앞으로도 변함없이 위의 과정들을 반복할 수만 있다면, 삶에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이처럼 반복되는 나의 삶의 주기 중에서 두 개의 순간, 즉 시나리오와 스토리보드의 시간들을 칼로 자르듯 베어낸 단면이 바로 이 책이다. 어찌 보면 내가 가장 외롭고 고독할 때의 기록이자, 촬영장의 즐거운 대혼란을 관통하기 이전의, 고요하고 개인적인 순간들이다.”

각본집 본문에 적힌 인터뷰처럼 봉 감독 자신은 자신의 대본과 스토리보드지를 ‘가장 외롭고 고독할 때의 기록’이라고 말했다. 그 기록들을 보고 있노라면 장르를 바꿔가며 무서운 속도로 폭주하는 영화‘기생충’의 가장 어둡고 깊은 지하에서, 마치 근세가 모스부호를 누르고 있듯, 묵묵히 대본을 쓰고, 스토리보드를 그리는 봉 감독이 보이는 것 같다. 따라서 각본집 세트는 봉준호 감독, ‘봉테일’ 그 자체라 볼 수 있다.

봉 감독은 책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아이디어 단계부터 녹음까지 일곱번을 반복했다는 표현처럼 ‘영화는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장인정신의 산물이다’가 아닐런지. ‘여기에 인쇄된 시나리오·스토리보드와 완성된 영화가 어떻게 다른지, 영화 속 장면들을 다시금 떠올리면서, 차분히 비교해 보시라고. 그 달라진 작은 부분들이야말로, 어느 감독이 촬영 현장과 후반 작업의 긴 시간들 동안 나름의 촉수를 곤두세우며 끊임없이 고민을 계속해온 증거라고’는 말해서 그 일단이 엿보인다.
/김명식 기자 msk@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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