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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발견 <2> 창평 장흥고씨 종가 '학봉종가'

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발견 <2> 창평 장흥고씨 종가 '학봉종가'

가문 대대로 충의(忠義) 지킨 전라도 명문가

고경명 의병장 삼부자 ‘불천위’ 가문 영예

고광순 의병장 ‘불원복’보물 지정절차 밟아

고정주 ‘창흥의숙’ 인재양성 요람 자리매김

고영준종손불원복기
불원복기(不遠復旗)를 들어 보이는 종손 고영준씨. 바른길로 되돌아와 후회를 남기지 않으리라는 주역복괘 ‘불원복’, 고광순은 나라를 곧 되찾게 될 것이니 힘것 싸우라는 격려를 담은 군기를 만들고 조석으로 배례했다.
명패2
학봉종가 명패
종가안채마당
학봉종가 종택 안채
종택불천위제례
학봉종가에서 불천위 제례를 모시는 두번째 안채
학봉종가사당2
학봉종가의 사당
녹천고광순의병장기념관
녹천고광순의병장기념물 전시관
고광순 사적비
포의사 외삼문 앞에 있는 녹천고광순사적비

충의 전통을 잇고 있는 담양 창평 장흥고씨 의열공파 ‘학봉종가’를 찾았다. 학봉종가는 임진왜란 의병장 고경명 장군 3부자의 충절·의열이 민족과 연결고리가 된 것이다.

고경명 장군의 후손인 고광순 구한말 의병장은 “가국지수(家國之讐 집안과 국가의 원수)를 갚자”며 의병을 모았다고 한다. 일본군은 나라의 원수고, 종가조인 학봉 고인후를 죽인 가문의 원수다. 가문의 삼부자 ‘불천위’(나라에서 큰 공훈을 인정하여 제사를 영원히 모시도록 허락함), 그 명예만큼이나 후손들의 고난도 컸다. 종택도 불타고, 학업도 어려웠다.

창평의 주역은 언양김씨에서 함평이씨로, 다시 장흥고씨로 바뀌었다. 김천일 장군이 언양김씨인데 그 집안의 사위로서 황해감사를 지낸 이경이 학봉 고인후의 장인이다. 고인후가 금산전투에서 전사하자 그 아들(외손자)를 창평으로 데려와 상월정을 물려준다. 이렇게 장흥고씨 학봉파가 창평에 세거하게 된다.

창평은 들 넓고 물 좋아 흉년이 적고 풍요로운 부자동네였다. 조선 후기 창평현은 고씨 집성촌이 됐고 천석꾼 부자가 수두룩했다. 창평현의 문제 중 상당수가 고씨 집안 문제이기도 해 집안 원로가 협의해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동학농민전쟁 같은 혼란기에는 피를 부르기도 하건만, 창평엔 그런 사례가 없었다. 순절한 노비 ‘봉이·귀인’의 충노비를 세우고 매년 제사를 올리는 것에서 고씨가문의 가풍을 엿볼 수 있다. 전라도 삼성삼평이라는 고장명성과 호남명문가를 엮어 ‘창평고씨’라 하는데 그 중심에 장흥고씨 ‘학봉종가’가 있다.


◇영학숙 연 만석꾼 부자 고정주

고정주는 규장각 직각 벼슬을 던지고 1905년 낙향해 창평에 영학숙(英學塾)을 열었다. 학생은 차남 고광준, 사위 김성수, 동생 김연수였다. 이후 학생수 50명으로 ‘창흥의숙’을 열고 국사·영어·일어·산술 등 신학문을 초등과 3년, 고등과 6개월 속성과정으로 가르쳤다. 이들은 일본에 유학해 독립운동을 주도하는 등 저마다의 방식으로 국권회복을 실천한다.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는 순창에서 외가인 창평으로 왔다. 손기정 일장기 삭제 사건 당시 동아일보 사장이었던 독립운동가 송진우, 기미년 2·8독립선언 학생 대표였고 제헌국회의원 백관수도 창흥의숙을 열었던 상월정에서 성장했다.

“일본에 맞서 싸우자”라는 고광순. “학교 세워 세상에 맞서자”라는 고정주. 칼과 펜의 서로 다른 입장에도 충돌하지 않았다. 밤이면 고정주의 쌀창고에 고광순의 사람들이 들나 들었어도 추궁하지 않고 모른척했다고 한다.

◇최초 소총 무장의병 이끈 고광순

고광순 의병장은 기삼연과 함께 장성에서 창의회맹(의병을 일으키겠다는 결의) 이래 창평의진을 결성해 정읍·순창·구례 등지에서 대일항전을 벌였다. 이에 일본군이 마을을 둘러싸고 종택을 불태우고 보복했다. 고광순 의병장은 군사력을 기르기 위해 민간 포수 의병을 훈련시키기 위해 피아골에 들어갔으며 ‘불원복’(나라를 곧 되찾게 될 것이니 힘껏 싸우라는 격려를 담은 태극기·등록문화재 394호)의 군기를 세우고 장기항전 전략을 수립했다. 이후 일제 군경의 기습을 받아 연곡사에서 장렬히 전사할 때가 그의 나이 60세였다.

고광순 무덤을 찾은 매천 황현은 “나같이 글만 아는 선비 무엇에 쓸거나. 이름난 조상의 집 그 명성 따를 길 없네”라고 추모했다.

학봉종가의 가훈은 ‘세독충정’(대대로 나라에 충성하자)이다. 일제가 불태운 종택에 남은 것은 신위와 불원복 태극기(등록문화재 394호), 그리고 씨간장 뿐이었다. 학봉종가의 노력으로 불원복 태극기는 보물로 인정 받기 위해 현재 절차를 밟고 있다. 고광순의병장사적비와 포의사도 방문객들의 발길을 붙잡고 있다. ‘소나무 언덕’이란 이름으로 한옥스테이 형태의 종가 체험도 운영하고 있다. 씨간장으로 맛을 낸 종가음식도 빼놓을 수 없는 자랑거리다. 상월정과 호남의정신관은 민족 얼 향상 교육의 공간이 되고 있다.
/서정현 뉴미디아본부장·송민섭 기자 song@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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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의병체험을 위해 담양군 창평면 유천리에 건립된 호남의정신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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