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525)

6부 2장 용골산성 전투(525)

“첨방군이 몇 명인가.” 정충신이 물었다.

“5백입니다.”

“그들도 대저도로 들어갔는가?”

“아닙니다. 대저도로 들어가지 않고 산에서 나무뿌리와 풀뿌리를 뽑아먹고 연명하고 있습니다. 복수를 하려고요.”

“풀뿌리를 뽑아먹고 복수를 한다고?”

“첨방군은 본래 1000이었습니다. 그런데 500이 전사했습니다.”

“500이나 죽었어?”

“싸우던 사람들이 모두 도망가니 대신 싸워야지요. 적의 석거포와 홍이포의 총알받이가 되었나이다. 먹을 것이 없어도 악착같이 싸웠습니다. 소인 역시 첨방군의 일원입니다.”

“가난은 나라도 구제를 못한다고 했겄다. 그런데도 목숨 바쳐 싸웠겄다? 자, 용골로 가자.”

정충신은 이학례를 앞세워 용골산성으로 말을 몰았다. 가는 도중에도 첨방군에 대해 물었다. 궁금한 것이 너무도 많은 것이다.

“그대는 말씨로 보니 전라도 출신이 아니고, 관서지방 사람같은데 어찌하여 전라도 첨방군에 합류했나?”

“소인은 본디 용렬한 일개 무부(武夫:보잘것없는 무사)였습니다. 후금군이 소인 집을 습격해 내자를 겁탈하고 아이들을 죽였습니다. 이 소식들 듣고 창을 들고 쫓아갔지요. 과연 내자가 옷이 벗겨진 채 죽어있었고, 아이들은 복부에 창이 꽂혀 있었습니다. 눈이 뒤집혀지더마요. 그래서 단박에 후금군 두놈의 배때지에 창을 꽂았는데 다른 놈에게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칼을 맞으려는 순간 첨방군이 달려들어 이놈들을 단칼에 베었습니다. 가족을 잃어 분한 소인은 용맹한 전라도 첨방군을 따르며 보복에 나섰지요. 소인의 칼로 50은 베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첨방군 장수가 상부에 치계하여 별장 자리에까지 올랐나이다.”

“별장이 아니라 파총이라 하지 않았던가?”

“소인 이름이 송파청인지라, 동료들이 소인 이름을 따라 그렇게 불러주었습니다. 어차피 그 계급장을 받을 것이니 미리 가불해서 불러준다고 하였나이다.”

“잘 되었군. 그런데 500의 첨방군이 한꺼번에 몰살 당했단 말인가? 그렇게 어수룩한가?”

“아닙니다. 북방은 추위가 극심한 곳이라서 방수(防戍:국경지대 방어)하는 데는 보통 체력이 아니고는 어렵습니다. 보초를 서라고 하면 일반 병사들은 대부분 얼어붙은 강을 건너 도주해버리지요. 그런데 첨방군은 여름 핫바지를 입고도 굳건히 지켰습니다. 이들이 지켜주니 응수군의 군세(軍勢)가 자못 강대하고 변방의 정세가 믿음직하게 되었습니다. 풍찬노숙을 한 지 이미 오래 되었으니 지칠 만한데도 결연히 지켰습니다. 이것을 보고 지방 현령이 소를 잡아서 먹이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첨방군은 산에서 사냥한 노루와 사슴, 멧돼지를 살로 발라서 오히려 마을로 내려보냈습니다. 그런 어느날 수만 명의 오랑캐 군대가 쳐들어와 이들을 기습했나이다.”

후금군 중에는 이괄의 난 때 죽은 한명련의 아들 한윤이 끼어있었다. 그는 조선 군대의 약점을 너무나 잘 알았다. 오줌을 누면 그대로 얼어버리는 변경의 매서운 추위, 그중에서도 한밤중 추위를 이겨내느라 서로 몸을 밀착시켜 잠을 청하는데, 이때 기습을 한 것이다.

누르하치 살아생전에도 조선 침공을 청하던 한윤은 그 차자 다이샨이 권력욕 없이 뒤로 물러서자 실권자 자리를 꿰찬 8남 홍타이지를 충동질해 조선 침공에 나섰다. 홍타이지는 친금 노선을 가던 광해군을 몰아내고 친명을 외치는 인조와, 가도를 중심으로 후금을 노리는 모문룡을 잡기 위해 아민에게 3만 병력을 주어 조선을 침공하게 한 것이다. 후금군은 길 안내를 맡은 한윤을 따라 의주성을 함락하고, 남진했다. 조선군의 약점을 잘 아는 한윤이 선두에 서니 국경선을 지키는 첨방군이 속수무책으로 당해버렸다.

후금군은 누르하치의 장질(長姪) 아민을 앞세워 1627년 1월 8일 3만 병력을 이끌고 심양을 출발해 1월 13일 오후 압록강에 당도했다. 한윤을 선봉대로 한 후금군은 랑거리, 야순, 예천, 뭉간 등 80여 장수가 군졸을 5개조로 편성해 심야 작전으로 변경을 지키는 첨방군을 공격해 섬멸했다. 여세를 몰아 한족 옷으로 변복한 채 의주성에 난입해 군기 창고의 무기를 탈취한 뒤 불태우고, 대낮부터 술에 취해 헛소리하는 의주 부윤 이완을 잡아 뜨거운 물에 삶아죽였다. 이완은 충무공 이순신의 조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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