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526)
6부 2장 용골산성 전투(526)

“이완이 왜 그렇게 되었더란 말이냐?”

정충신이 놀라서 물었다. 그는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에 핵심 막료로 참가했던 사람이고, 왜란 시 광주목사에게 전통을 가지고 왔을 때 만났던 사이다.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뒤 정신적으로 공황상태에 빠졌던 모양입니다. 북방 변경으로 전속오더니 타락해버렸습니다. 기생들과 지내거나 술에 취해 비틀거렸나이다. 오랑캐가 쳐들어오자 혼비백산 급히 군사를 모았으나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의주성이 함락되고, 조선인 수천 명이 생포되어 살해되는 가운데 이 부윤은 펄펄 끓는 솥에 산 채로 집어넣어져 죽었졌나이다. 후금은 광해를 배신한 죄를 묻겠다고 이런 짓을 했습니다.”

“음, 그게 누구 짓이라고 했겄다?”

“아민입니다.”

후금 태조 누르하치 생존 시에도 조선 정벌이 논의되었으나 누루하치는 조상의 나라라고 해서 한사코 외면했다. 4대 버이러(패륵:최고사령관) 중 서열 1위였던 암바 버이러(패륵) 다이샨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조선 정벌은 실행되지 않은 듯했다. 다이샨은 정충신의 오랜 벗이었다. 정충신은 홍타이지와도 친교가 있었지만 괴팍하고 거칠고, 늘 도발적이어서 가능하면 저촉을 피했다. 이때 누루하치가 죽었다.

홍타이지에게 기가 왔다. 홍타이지보다 서열이 위였던 아민(누르하치의 장조카)이 더 강력하게 조선 침공을 주장했다. 용맹을 무기로 삼는 아민과 홍타이지, 왕족 호오거가 경쟁적으로 침략 분위기로 몰고 가 추위가 유독 심한 1월 압록강을 넘어서고야 말았다.

속잡록(1627년 1월13일)에 따르면, 1627년 1월 8일 후금 2대 칸 홍타이지는 모문룡을 친다는 명분으로 아민, 지르가랑, 아지거, 두두, 요토, 쇼토, 호오거를 대장으로 삼아 조선땅을 침범했다. 그런 얼마 후 화약을 맺었다.

화약을 맺고 후금군이 후퇴 중 많은 행패를 부렸다. 조선군은 이에 대한 대응으로 후금군을 격퇴했는데, 후금은 자기 군사들 피해를 강조하며 공격을 퍼붓는 것이다. 아민에 이어 지르가랑 타이지, 아지거 타이지, 두두 타이지, 요토 타이지, 쇼토 타이지 응원 군대까지 보내어 조선 땅을 유린했다.

“모문룡 군사의 군량과 무기 보급처는 서북지방이고, 조선이 이들에게 도움을 주었다고 보는 것이지요. 이것을 한윤이 알렸습니다. 한윤의 안내로 의주성에 들어와 무기 창고에 불을 지르니 온 성중이 어지러워지고, 반란민이 성문을 열어젖히자 겁먹은 백성들이 적을 맞아들여 성이 함락되고, 이완 등이 사로잡혔습니다. 변경 방어 진지에서 인력 손실이 큰 첨방군 중 잔여부대가 들어왔는데 후금군이 서군과 남군으로 나누더니 첨방군이 속한 서군을 모조리 죽였나이다.”

“서군과 남군으로 갈라놓고, 첨방군을 죽이다니?”

“병졸들이 무슨 의도인지 알지 못하고 부대별로 좌우로 모이자, 적도들은 첨방군을 편을 가르더니 다 죽엿습니다. 이완을 끓는 물에 삶아서 제상에 올려 하늘에 제사 지내고, 최몽량에게는 항복하라고 명하자 최몽량이 크게 꾸짖으며 ‘이 금수 개돼지놈들아! 이 지경이 웬 말이냐? 이웃 나라의 도리가 과연 이러하냐?” 하니, 최몽량도 난도질하여 죽였나이다. 그들은 패잔병 조선군과 조선 백성들의 머리를 깎고 후금 군대에 편입시켜 군용(軍容:군의 위용)을 새로이 하였나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후금군이 수만명, 만문노당에는 3만명 죽었다고 기록되었으나, 속잡록과 연려실기술에는 전라도 지방에서 올라온 첨방군 위주로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용맹스런 첨방군을 제거하면 서북지방 군사와 백성들이 따르리라고 본 전략에서 나온 것이었다.

한윤은 누르하치에게 올린 상소에서 의주에 있는 남도 군사는 1천 남짓이라고 보고했다. 향병(鄕兵)과 군민은 모두 합쳐 2천 남짓이라고 했다. 여러 가지 면을 고려하면 후금군이 살육한 조선인은 1천 정도인데 그중 첨방군이 절반이 되는 것이었다. 정충신이 파총에게 명했다.

“나는 지금 성경(오늘의 선양, 후금의 수도)으로 갈 것이다. 가는 길에 고을마다 들러서 군량을 확보해 보내줄 것이다. 첨방군의 사기를 진작시키도록 하라.”

“부원수 나리는 무엇 땜에 가시려구요?”

“알 것 없다. 다만 적장이 용골산성의의 뒷고개에 주둔하여 다섯 갈래의 병마로써 세 겹으로 포위하여 지키고, 일곱 갈래의 병마로써 각각 일곱 면을 노략하려 할 것인 바, 여기에 첨방군을 투입하라.”

이 말을 남기고 정충신은 방향을 돌려 북으로 말을 달렸다.

“모문룡이 입안의 가시처럼 여겨진다면 후금이든 명군이든 가도로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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