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537)

6부 2장 용골산성 전투(537)

명말청초(明末靑初) 명의 장수 유흥치는 잠시 가도에 머물렀다. 직접 병무상서(국방장관)의 명을 받고 부임했지만 가도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모문룡을 견제하라는 것인지, 후금 공격을 지원하라는 것인지 헷갈렸다. 대신 그는 요동 병부시랑 원숭환과 모문룡 간에 눈에 보이지 않는 암투가 벌어지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몇 달 뒤 북경으로 돌아갔다. 원숭환과 모문룡 간의 암투가 정리된 뒤에 들어와도 된다고 그는 판단했다.

한편 원숭환은 여순(旅順) 앞바다 쌍도로 모문룡을 오도록 명했다. 의심이 많은 모문룡이 요동반도로 들어오는 것을 경계했으므로 해군단을 이끌고 와도 무방하도록 여유있게 쌍도로 오도록 조치한 것이다.

과연 모문룡이 수백 척의 선단을 이끌고 쌍도로 들어왔다. 사뭇 무력시위나 다름없이 2만8천명의 해군 병력을 이끌었다. 봄바람 살랑이는 5월 하순(1629년), 선단이 들어오자 바다가 꽉 찬 듯했다. 쌍도의 산 정상에서 바다를 건너다 본 원숭환이 씹듯이 읊조렸다.

“과연 해외 천자(天子)의 행차로군. 하지만 해외 천자는 마지막 항해가 될 것이야.”

그는 부관을 대동하고 바닷가로 나갔다. 모문룡 선단이 거칠것없이 들어와 부두에 정박했다. 그들이 모두 들어온 뒤에도 모문룡은 원숭환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윽고 6월 초사흘, 모문룡이 원숭환을 불렀다. 완전히 주객이 전도된 양상이었다.

원숭환이 면담 장소에 이르자 대청마루에 산해진미가 가득찬 잔칫상이 차려져 있었다. 잔칫상 주변에는 조선의 미인들을 한족 옷을 입혀 세워놓았다. 그 여인들이 하나같이 빼어난 미모였다. 강계 미인들을 납치해온 여인들이었다. 모문룡이 연회장에 들어선 원숭환을 향해 꼿꼿한 자세로 고했다.

“병부시랑 겸 요동순무 원숭환 대장을 진실로 환영하는 바이요. 자, 소관의 술잔을 받으시오.”

말 그대로 원숭환은 손님이었고, 모문룡은 초대하는 해외 천자였다. 술자리는 무르익어갔다. 모문룡이 이윽고 혀꼬부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원 병부시랑, 나 너무 미워하지 마시오. 원 병부시랑이 나를 때려잡으리라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소이다. 장수 자리를 내려놓으라는 것인데, 어찌 장수가 달리는 말에서 내릴 수 있소? 요사(遼事:요동을 수복하기 위해 후금군을 몰아내는 일)를 마치면 가도에서 조용히 은퇴생활을 할 작정이오이다.”

가도를 계속 장악해 해외 천자로 남겠다는 뜻을 비춘 것이다.

“나라를 생각하는 충정, 고마운 일이오. 본관 역시 모수의 혁혁한 전공을 높이 평가하는 바이요.”

“그렇지요. 이 섬은 조선 땅이지만 소관이 정벌한 것이오이다. 그러니 명국이지요. 군량도 3년분을 비축해놓았소. 조선의 관서지방은 물론 관북지방까지 나가서 징발한 군량이오. 후금군이 노략질해가는 것을 대신 가져왔소이다.”

군량을 조선에서 노략질한 것은 맞지만 후금군이 노린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다만 그렇게 위세를 부려보는 것이다.

“벌써 6월이니 초여름이군요. 산책이나 나가시지요.”

원숭환이 말하자 모문룡이 듣던 중 반가운 말이라는 듯 응수했다.

“산으로 여인들을 올라오도록 하지요. 가무가 끝내줍니다. 속궁합은 더 말할 필요가 없고요. 조선 남정네들 정말 복받은 놈들이오, 하하하.”

농담인지 진담인지 말하고 모문룡이 제 풀에 껄껄껄 웃었다.

두 사람은 취흥에 젖어 뒷산을 올랐다. 안개가 띠처럼 섬을 맴돌고, 바다는 잔잔했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이 춘심을 자극했다. 산 중턱의 장막에 이르렀을 즈음, 갑자기 복면한 복병들이 들이닥쳤다. 원숭환이 정예 복병들을 미리 배치해놓은 군사들이다.

“포박하라.”

대번에 원숭환이 명하자 복병들이 모문룡을 포박했다. 원숭환은 3만의 군사들이 몰려들까봐 그 자리에서 재판을 열었다. 그는 12가지 죄목을 나열했다.

“그대는 적과 제대로 싸우지도 않으면서 공을 세웠다고 황제를 속이고, 사사로이 백성들의 물건을 약탈해 장물을 쌓은 도적이 되었으며, 부하와 여염집 부녀자를 빼앗아 음행을 일삼았으며, 환관배들을 매수하여 황실의 질서를 어지럽혔으며, 한 뼘의 땅도 수복하지 못하고 적(후금)과 내통했으며, 병마와 전량(錢糧:현금과 양곡)을 사용하면서 감사받기를 외면한 죄 등을 물어 참형에 처한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원숭환이 직접 상방검(尙方劍: 대장군 혹은 대원수가 되어 출전할 때 임금이 직접 하사한 칼)으로 모문룡의 목을 쳤다. 조선으로서는 목의 송곳을 제거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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