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538)

6부 3장 유흥치 난(538)

모문룡을 참수한 뒤 원숭환은 명 황실에 다음과 같이 치계(馳啓:보고서를 올림)했다.

-평안도 철산반도 남쪽에 위치한 가도에 주둔한 모문룡의 군대는 명을 보위하고 조선을 보호한다는 이름 아래 명예가 높았으나 모문룡이 주둔비와 작전 비용은 물론 각종 상납과 비행으로 군인으로서 지켜야 책무를 다하지 못했나이다.

주지하다시피 조선이 중원으로 나아가자면 반드시 거쳐야 할 곳이 요동이었으나 오랑캐가 점령했으므로 가도 해로를 뚫어 북경으로 들어왔습니다. 이곳을 지키는 가도의 명군은 어이없게도 패잔병 무리였습니다. 사르후 전투 이후 연패하던 명이 요동마저 잃게 되자 하찮은 중군장급 군관 모문룡이 떠도는 패잔병을 모아 부대를 편성해 평안도 용천 의주 삭주, 멀리는 관북지방까지 떠돌며 노략질로 연명했습니다. 부모의 나라 군대가 행패를 부리므로 광해가 설득하여 가도에 묶어두니 청천강변에서 활개를 치는 것보다는 나았으나 갈수록 타락하였습니다.

광해가 쫓겨나고 인조가 즉위하자 모군은 반정세력의 구세주가 되어 조선 점령군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요동이 막혀 험난한 해로를 이용하는 조선의 책봉 사절단을 통과시켜준다는 미명하에 조선으로부터 군량은 물론 온갖 뇌물을 챙겼습니다. 모는 그 자금으로 조정의 최고 실세들을 구워삶아 마음놓고 부정을 저질렀습니다. 이렇게 하여 모문룡이 군사작전보다는 조선을 등치며 ‘해상 천자’ 놀음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조사에 의하면, 모수는 인조 즉위 원년(1623년)에 쌀 6만 석을 받았습니다. 인조가 명의 책봉을 받은 이듬해(1626년)에는 16만 석을 가져갔습니다. 조선은 모문룡 군량을 채우기 위해 전국 백성에게 토지 1결당 쌀 1말5되를 징수했습니다. 이외에도 평안도 황해도 일대의 수령들에게 은과 군량을 강탈하고, 어여쁜 여인은 나이를 불문하고 끌고가 음행을 저질렀나이다. 그러면서 황제에게 보여주기 위해 후금을 정벌하겠다고 나섰으나 뒤로는 후금 세력과 결탁하여 때로는 패잔병을 몰래 보내 지원하기도 했나이다. 이에 요동 병부시랑 겸 요동순무 원숭환의 이름으로 역도 모문룡을 참수로서 죄를 물었나이다.

장계를 받은 명의 황실은 당장 뒤집어졌다. 특히 환관 위충현이 방방 뛰었다. 자금줄이 졸지에 사라져버렸으니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이다. 그의 상납금으로 환관들의 붕당인 엄당(?黨)을 꾸려가고 있는데, 그것이 차단되면 조직을 끌고 가기가 힘겨운 것이다. 그러잖아도 근래 그의 엄당과 관리들의 정파인 청의파(淸議派) 동림당(東林黨) 사이에 당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데 세에 밀릴 위기에 있었다. 이런 때 모문룡의 자금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였다.

“황제 마마, 황제의 재가도 없이 최전선의 장수를 참수하는 것은 중국 역사 이래 전무후무한 일입니다.”

위충현의 말을 듣고 황제는 당장 원숭환을 삭탈관직했다. 그러나 위충현과 그의 막료 온체인은 그것으로 끝낼 일이 아니었다. 갈아먹어버려도 시원찮을 놈인데, 삭탈관직으로 명줄을 보존케 하다니.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황제 귀에 대고 원숭환의 모반 징후를 읍소했다. 결국 원숭환은 1630년 9월 22일, 베이징의 서시거리에서 온몸을 토막내 죽이는 능지처참형에 처해졌다. 그의 시신은 갈기갈기 찢어져 광거문의 하늘을 나는 비둘기 밥이 되었으며, 머리 하나가 남아 걸인들에 의해 광동의원(廣東義園)에 묻혔다.

원숭환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요동을 방위하던 병사들이 일제히 후금에 투항했다.

“이건 나라도 아니다.”

명나라는 급격히 몰락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이를 막기 위해 유흥치를 가도로 내려보냈다. 유흥치는 한때 가도에 파견된 적이 있었다.

“기강이 말이 아니군.”

가도 명군 본영에 이른 유흥치는 가도의 동향을 살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가다듬었다.

가도는 명의 중군장 진계성 휘하에 있었고, 여전히 질서가 어지러웠다. 말 그대로 무법천지였다. 거기에 군사는 후금 홍타이지로부터 귀순 위협을 받고 있었다. 유흥치는 진계성을 무질서 방치 책임을 물어 살해(1630년 3월)하고 독자 세력을 구축한 다음 후금과 동맹노선을 취했다. 그러면서 조선에 물자 징색(徵色:얼굴에 나타냄)을 멈추지 않았다. 모문룡의 병참 전략을 따른 것이다. 즉 병참선은 조선땅에 기대 군량과 피복, 무기 따위를 확충하는데, 이는 모문룡보다 한수 더 뜨는 패악질이었다.

부원수 정충신은 유흥치의 패악질을 묵과할 수 없었다. 삵괭이를 물리치니 범이 달려드는 꼴이었다. 정충신이 조정에 이런 상황을 알리고 군사를 모아 철산 앞바다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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