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542)

6부 3장 유흥치 난(542)

상감 앞에서 주요 신료들이 참석한 가운데 긴급 회의가 열렸다.

“너무 성급하지 않소이까?”

윤집과 오달제가 정충신을 향해 따져물었다. 그를 부른 것은 멋모르고 유흥치의 심기를 건드려 공연히 화를 불렀다는 것을 추궁하기 위해서였다. 이 대목에서 왕도 무겁게 침묵을 지켰다.

“그럴 일이 있었습니다.” 정충신이 짧게 응수했다.

“그럴 일이라니요?”

“신이 보낸 첩서를 받지 못했습니까?”

“첩서라니? 무슨 첩서를 보냈단 말인가?” 왕이 물었다.

“전란 중에는 장수는 전선에 있어야 합니다. 상감마마께옵서 이서 대감을 총융사, 신을 주사원수로 임명하실 때, 연락병으로부터 긴급 밀지를 받았습니다. 가도와 철산 일대에서 유흥치 군사가 분탕질하여 심상치 않다는 밀지여서 그 길로 철산으로 말을 달렸나이다. 과연 유흥치의 행패가 극심한지라 그런 사정을 첩서에 적어 궁으로 보냈는데, 아직 당도하지 못했군요.”

“행패는 어떤 것인가.”

정충신은 첩서에 적었던 내용을 설명하고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유흥치는 반란을 일으켰다 하여 본국에서도 식량과 무기 공급을 중단했나이다. 그래서 조선에서 식량을 공급받기 위해 위조문서를 써서 조정에 올린 것입니다. 이것을 거부하고, 그를 투옥하라는 치계였사옵니다.”

조정은 정충신이 보낸 서찰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유흥치의 협박성 문서에 갈팡질팡한 셈이었다. 정충신의 첩서가 아직까지 도착하지 않은 것은 말을 달리던 연락병이 청천강 인근에서 유흥치 정탐병들에게 붙들려 졸지에 목숨을 잃고, 첩서를 탈취당했기 때문이었다.

첩서를 탈취한 오랑캐들은 이것을 유흥치 군대의 본영에 보냈고, 유흥치는 첩서를 분석한 뒤 자문(咨文:외교문서)을 만들어 전국해를 통해 조선에 보낸 것이었다. 자문에는 쌀과 전마(戰馬)를 터무니없이 요구하고 있었다. 정충신의 첩서를 받지 못한 대신 전국해가 가져온 자문이 이러했으니, 정충신이 긁어 부스럼 만들었다는 것이고, 그렇잖아도 후금을 똥막대기 취급하던 대신들은 최명길 뿐아니라 정충신이 후금을 핥다가 이런 꼴을 자초했다고 역도 취급을 한 것이었다. 상감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나라에는 하도 의견이 많아서 일마다 이루어지지 않는다. 일관성이 없고, 때에 따라 자기가 하던 말도 뒤집는다. 그래서 과인 역시도 갈팡질팡 헷갈리는 수가 있다. 요즘의 일만 가지고도 토벌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했던 사람이 이제는 토벌하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 내가 어떡해야 하겠는가. 모두가 일정한 소신이 없기 때문인데, 거기에 비하면 정충신은 나라에 대한 충성심과 생각의 일관성이 있다.”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정충신이 나섰다.

“망극하옵니다. 일찍이 군대는 기개를 주축으로 하는 조직입니다. 기개에는 아침, 점심, 저녁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견이 통합되지 못한 채 헛되게 날만 보내고 끌게 되면 장수나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방향성을 잃게 됩니다. 장수가 중심을 잡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지휘력은 올바른 판단력과 과단성과 통찰력이 있어야 하는 것인즉, 그 힘은 삿된 사사로움이 없는 데서 찾아집니다.”

“옳거니. 군대는 권위와 명예가 있는 법, 정 장수가 졸지에 떠나버리니 이런 사단이 났다. 제대로 출정식을 갖고 떠나야 한다. 명예로운 군인일수록 분열식(分列式)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누구도 권위를 인정한다. 장수의 세계란 형식이 내용을 지배하는 것이니 엄격하게 출정식을 갖고 임지로 떠나기 바란다.”

상감은 갑옷과 활과 칼을 하사했다. 정충신은 한강으로 나가 전선(戰船)에 올랐다. 한강 연변에는 백성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고, 이백보에 걸쳐 기라병들이 일렬로 도열한 가운데 오색 깃발을 흔들었다.

출정식에는 평성군 신경진, 완성군 최명길, 영해군 김종, 대사간 이명한 등이 참석해 정충신의 무운을 빌었다. 윤집과 오달제는 끽 소리 못하고 주눅든 모습이었다. 닻을 올리자 전선은 미끄러지듯 마포를 지나 김포 월곶을 거쳐 교동도에 이르렀다. 교동 앞바다에는 벌써 충청수사 송영망, 경기수사 유응형의 선단이 좌우익을 이루어 호위했다. 정충신이 막료장에게 물었다.

“전라도 배가 보이지 않는구나.”

가장 용맹스런 전라도 선단이 보이지 않으니 정충신은 내심 의아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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