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554)

6부 3장 유흥치 난(554)

육지의 재령, 신천, 안악을 휩쓴 유흥치군의 일부가 이쪽으로 내려와 있었다. 석도 앞바다에 떠있는 적선이 유흥치군의 잔당이었다. 이들은 군사 조직이라기보다 밀수와 강도질, 아편과 술을 거래하는 폭력조직이었다. 온천물이 좋은 용강에서 약탈한 물건을 거래하며 아편과 술에 절어있는 것이다. 백성들은 후금군에 당하고, 또 명의 모문룡, 유흥치 군에 연이어 당하고 있었다, 정충신이 옷을 꿰입은 보생을 앞에 세우고 말했다.

“몇살이렸다?”

“열여덟이옵니다.”

“꽃다운 나이로군. 그러니 저것들이 욕심을 냈구나.”

이마의 솜털이 보송보송하고, 흰자 가운데 머루알처럼 검은 눈동자가 또렷하고, 이목구비가 분명한 미모였다. 누구도 욕심낼만한 처녀였다. 며느리로 삼아도 될 만했다.

“용강으로 돌아가거라. 네 어미가 목메어 기다리고 있다. 배를 내주겠다.”

“아니 가겠습니다.”

“아니가다니? 어머니가 기다리는데 가지 않겠다고? 왜 그러느냐.”

“가봐야 또 이렇게 삽니다. 가있을 곳이 못됩니다. 난리가 없는 곳으로 가고 싶습니다.”

정충신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나라가 허약한데 어딘들 과년한 처녀를 보호해줄 곳이 있겠는가. 난리는 하찮은 산천초목에도 내려앉아 있다. 나라의 힘을 키워야 무지랭이 백성들을 보호할 수 있는데, 그럴 능력이 없다. 정충신이 생각 끝에 부장과 중군장을 불렀다.

“군사 중에 건장한 전라도 병사 셋을 골라오라.”

한참 후 중군장이 허우대 멀쩡하고 체격 좋은 젊은 병사 셋을 골라 막영지로 왔다. 정충신은 이들을 앞에 세우고, 보생을 불러냈다.

“세 병사 중 마음에 드는 자를 골라라.”

“네?”

보생이 당황하는 눈빛으로 주춤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난리가 없는 곳으로 가 살고 싶다고 하지 않았느냐. 평화로운 곳은 전라도 땅이다. 평야가 드넓으니 먹고 사는 데는 힘들지 않을 것이다. 네가 고른 병사들은 모두 전라도 출신들이니 그와 함께 내려가도 된다.”

“싫어요. 저는 그럴 몸이 아니어요.”

순결한 몸이 아니라는 뜻이리라.

“너는 몸을 더럽힌 것이 아니라 못된 놈들에게 몹쓸 짓을 당했을 뿐이다. 너는 어떤 누구보다 순결한 여자다. 낙심하지 말고 내 뜻을 따르라.”

보생이 얼굴을 가리며 한동안 몸을 떨며 흐느껴 울었다. 정충신의 말이 위로가 되고 용기가 되는 것이다. 정충신이 연민의 눈빛으로 보생을 내려다 보며 다시 말했다.

“원하거든 엄마를 모시고 남쪽으로 내려가거라. 지체할 것 없다. 저 젊은 병사들 중 하나를 골라라.”

이윽고 보생이 얼굴을 들고 세 병사 중 눈썹이 짙고, 가슴이 쩍 벌어진 병사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정충신이 그 병사에게 일렀다.

“고향이 어디냐?”

“전장포라는 곳이구만이라우. 임자도지라우. 새비젓이 허벌나게 나는 곳이구마요. 임자도에서 지도와 해제 임치를 내왕하는 나룻배 사공질을 했지라우.”

“잘 되었다. 그 힘찬 팔뚝으로 노를 저으면 가닿을 수 있겠구나.”

“암만이라우. 사흘만 배를 몰면 가질성부르요.”

그가 들뜬 표정으로 받았다. 군역질도 벗어나는데다 젊고 고운 처녀를 얻어가니 즐겁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배를 내줄테니 용강으로 나가거라. 그곳 신당에 이르러 소녀의 어미 당골네에게 이 소녀를 인도해라. 목숨을 살려준 보답이니, 이것으로 인연이 다한 것이라 이르고, 당골네와 소녀를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가거라. 고향으로 가도 좋고, 노를 젓다가 빈 섬이 있으면 그곳에 들어가 정착해도 좋다. 너만이 좋은 세상을 가질 수 있는 권한을 주마. 알겠느냐?”

“어지신 장군 나리,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그들이 떠나고, 정충신은 조수를 이용해 배를 띄워 광량만으로 향했다. 광량만은 대동강과 재령강이 흘러내려온 지점에 있었는데, 띠처럼 길게 뻗은 해안선이 아름다웠다. 만 어귀의 동쪽 끝에 있는 연대봉과 남서쪽 반도의 돌출부 사이에 유흥치 군사가 웅거하고 있었다. 연대봉 뒤켠에는 지계최와 조견 군대가 대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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