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566)

6부 4장 귀양

왕이 걱정할만했다. 유흥치의 선단이 박살이 나고, 유흥치가 죽자 전라도 수군도 철수한 것이다. 서해 바다를 깨끗이 치운 것은 좋았으나 지금 바다와 청천강에는 배가 없었다. 나투터의 나룻배만이 조을 듯이 묶여있을 뿐이다. 정충신이 정중히 말했다.

“그러므로 신이 가고자 하옵니다.”

그러자 중신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정묘호란이 끝난 뒤부터 시방까지 조선과 후금의 관계는 아슬아슬합니다. 한시도 편할 날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또 나간단 말이오?”

그동안 전선에 나가있었던 정충신에게도 그런 책임의 일단이 있다는 뜻이었다. 정충신이 물러설 수 없다고 생각하고 말했다.

“신은 후금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사대부들이 흔들었습니다. 오직 존명사대(尊明事大)만이 국정의 골간이 되어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였나이다. 흥치가 살해된 뒤 조선 땅 가도를 접수하려는데 신에게 소환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사이 가도를 탈출하여 후금에 투항한 자들이 홍타이지에게 가도를 빼앗을 기회가 왔다고 부추겼습니다. 그래서 홍타이지가 조선에 사신을 보내 겁박하지 않았습니까.”

홍타이지는 차관 호차와 중남을 조선에 보내 ‘조선이 유흥치에게 양곡을 주어 버티게 한 점을 사과하라. 용천, 철산 땅을 가도 한인(漢人)들에게 경작지로 제공한 점에 대해 해명하라“고 요구했다. 홍타이지는 정묘호란 때 한강 이북을 차지할 수 있었음에도 사내답게 군말없이 반환했음을 지적하면서, 그런데도 조선은 후금에 대한 예의를 다하지 않은 반면에 명을 따랐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은혜를 갚기 위해서는 조선이 배를 대라는 것이었다. 명나라에 보낸 것과 같은 양의 인원과 전마(戰馬), 물자를 실어나를 배 100척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는 조선의 배와 물자로 조선 땅을 점령하겠다는 것이다. 얼토당토 않는 요구였다. 조선은 배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배로 조선 땅을 밟게 하다니... 그 뿐만 아니라 이를 들어주게 되면 명나라 비위를 거스르는 일이 된다. 섣불리 주었다가 명이 알게 될 경우 군신 관계를 파탄내는 일이다. 그것은 조선의 국체를 허무는 일이었다. 정충신은 이런 외교적인 문제에 직면했다.

“정공은 수군인가 지상군인가?” 한 중신이 물었다.

“수륙 양군이오.”

“그러나 정공은 병중이오. 패기있는 젊은 사관이 출진하는 것이 낫지 않겠소?”

그를 장수로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공을 세울 기회도 박탈하겠다는 저의가 숨겨져 있었다. 거기에는 왕의 지지를 받는 것에 대한 반감도 작용하는 듯했댜. 시기와 질투는 그들의 힘이자 자산이었다. 남이 잘되는 꼴을 보지 못한다. 더군타나 학맥이나 문벌이 신통찮은 자가 상감의 사랑을 받는 것이 마땅치 않은 것이다. 정충신이 이금니를 지긋이 물고 신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대부의 자제들이나 전선에 내놓으시오.”

“그 말이 무슨 말이오이까.”

발칙하다는 듯이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중신이 물었다.

“양반 자제도 군역 의무를 다해야 하오이다. 호패법에 따라 군대를 안가면 양곡으로 대신하는데, 그마저 이행하는 자들이 없단 말이오.”

“어허, 무슨 망발을 그렇게 하시는가! 못쓰겠구먼!”

호패법은 조선 시대 신분증명서의 하나로 16세 이상의 남자에게 주어졌으며, 조세와 군역의 대상자를 알아보기 위해 시행했다. 그런데 양반 자제는 그런 의무에서 벗어나 있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시, 양반 자제들이 군역을 다하지 않은 대신 무지랭이 백성들이 나가 싸웠소. 굶주리며 싸웠소. 지금 또 후금이 변경에서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데, 사대부 자제들이 먼저 나가 싸우면 백성들이 용기백배해서 함께 싸울 것이오. 배우고 갖춘 자가 나라의 책무를 다한다면 어느 누가 따르지 않겠소.”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왕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서류 각반을 옆구리에 끼고 이리저리 바쁘게 다니지만, 나오는 결론은 뾰족한 것이 없다. 아랫돌 뽑아 윗돌에 박고, 윗돌 뽑아 아랫돌에 박는 인사 따위가 고작이다. 그것도 그들 기득권 중심이다.

“중신들은 정공의 말에 유의하렸다.”

왕이 거들고 나섰으나 그 뿐이었다.

팔도부원수 직으로 다시 돌아온 정충신이 한양을 떠나 안주 군영에 이르렀다. 평안감사 민영휘와 평안병사 유림이 찾아와 보고했다.

“후금군이 압록강을 건너 청천강 이북 가산 서쪽을 점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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