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트 친구
이성자(동화작가)

나와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박 할아버지가 양복에 넥타이까지 매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오셨다. 이발을 했는지 머리도 단정하다. 맨날 검은색 마스크를 쓰고 다녔는데, 오늘은 유난히 하얀 마스크가 할아버지 얼굴 반을 가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안에 같이 있던 초등학생 해오가 “할아버지, 왜 트로트 안 따라 불러요?”라고 물었다. “오늘은 어린이날 기념으로 ‘천사의 집’ 아이들에게 불러줘야 하니까 목소리 아끼려고 그런다.” 대답하는 할아버지 얼굴에 행복이 철철 넘쳐났다.

장난기가 발동한 해오가 “저도 트로트 잘 부를 수 있는데, 따라가면 안 돼요?”라며 해죽거렸다. 당장 뭐라고 잔소리를 할 것 같았는데 “정말? 같이 가서 노래 불러줄 수 있다고? 그럼 엄마에게 전화해서 허락 받아야지.” 그냥 해본 말인데 갑작스런 제안에 해오입이 헤벌쭉해졌다. 휴대폰으로 당장 허락을 받아낸 해오, “저는 막걸리 한잔 김영탁이 제일 좋아요. 할아버지는요?”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나는 정동원이가 제일 좋더라.” 주거니 받거니 기분이 좋아진 할아버지가 해오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를 내렸다.

할아버지 호주머니에는 항상 휴대용 MP3가 들어있다. “내가 필요할 때 나를 불러줘. 언제든지 달려갈게. 낮에도 좋아 밤에도 좋아. 언제든지 달려갈게 ~” 걸어 다니면서도 호주머니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 흥얼거리는 할아버지. 해오는 그런 할아버지를 만날 때마다 “제발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소리 좀 줄이세요.” 라며 구박을 한다. “인석아, 귀가 안 들리니까 그렇지.” 결국 해오는 양족 귀를 손바닥으로 막는 시늉을 하고, 같이 타고 있던 사람들은 아무 소리도 못 들은 척 웃기만 한다.

올해 83세인 할아버지는 시내 여자고등학교 교장을 정년퇴임한 분이다. 3년 전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로 혼자서 생활하고 계시는데, 매일 공원 등으로 놀러나가 시간을 보내다 돌아오신다. 그런데 ‘코로나19’의 사회적 거리두기로 아예 집에만 있게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미스터 트롯에 나오는 가수들을 보면서 겨우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고맙게도 시집간 막내딸이 트로트 모음 휴대용 MP3를 사다주어 요즈음은 노래도 듣고, 노래에 맞춰 춤도 추면서 지루한 하루를 견딜 수 있단다.

요즘 같이 팍팍한 세상에 이처럼 위로가 되는 친구가 또 있을까? 트로트가 주는 힐링의 시대. 지금은 바야흐로 트로트 전성시대라는 걸 할아버지를 보면서 실감할 수 있었다. 초저녁잠이 많아 저녁 일곱 시부터 자야한다는 할아버지가 목요일만 되면 ‘신청곡을 불러드립니다, 사랑의 콜센타’를 보기 위해 밤 열시까지 기다린다는 것이다. 트로트가 왜 그리 좋으냐고 물었더니 트로트를 듣고 있으면 고향이 생각나고, 어릴 적 친구가 그립고, 막걸리가 마시고 싶고, 어머니가 보고 싶고, 청국장 냄새가 난단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트로트는 나이든 사람이나 좋아하는 노래 정도로 여겨졌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런 인식이 깨지고 인기를 얻기 시작하더니 점점 그 인기를 더해갔다. 최근에는 <미스트롯> <미스터 트롯>이 방송을 타면서 트로트열풍이 안방에서까지 선풍적으로 인기를 얻게 되었다. 나 역시 트로트를 듣고 있으면 아련히 떠오르는 그리움으로 어느덧 마음이 느긋해 진다. 각박한 현실이 잠시 트로트 가사 속에 묻히며 인생이 다 그렇고 그런 것인 것만 같다.

생강차 한 잔을 앞에 놓고 “너나 나나 나나 너나 똑같은 인생. 나나 너나 나나 너나 똑같은 세상. 지지고 볶고 살아보아도 너나나나 거기서 거기. 니꺼냐 내꺼냐 따져보아도. 너나 나나 거기서 거기~.” 김호중이 부르는 《너나 나나》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가족이나 친지들에게 서운했던 갖가지 일들도 사르르 녹아내린다.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여기저기 마음을 써야할 곳이 수두룩할 것이다. “그래요. 마음대로 안 되는 인생사, 트로트 들으며 오늘도 즐겁게 파이팅! 하시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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