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585)
6부 4장 귀양

이런 서찰은 있을 수 없었다. 외교적 관례로도 어긋나는 일이었다. 지난번 신득연 차사가 왔을 때는 지체가 낮아 재량으로 주저앉혔는데,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이번에는 종2품의 거물이 강력한 단교의 서찰을 휴대하고 온 것이다. 재량으로 그를 억류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가는 길을 막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심양으로 들어간다면 필연코 전쟁이다. 정충신은 급히 체찰사 김시양을 찾았다.

“이건 필시 전쟁하자는 것이오. 준비도 없이 전쟁할 수는 없고, 물목 몇가지로 싸우자고 한다는 것은 너무나 얕은 수요.”

김시양도 이에 수긍했다.

“정 공이 지난번 신득연 차사가 왔을 때, 후금에 보낼 서신을 고쳐쓰려고 했다고 하던데, 그래서 더 고약하게 써보낸 것으로 보이오. 조정에서는 정 공을 오해하고 있단 말이오.”

“오해하건 말건 서찰을 그대로 가지고 가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돌려보냈지요. 그런데 더 요란한 편지가 왔습니다.”

“허면?”

“더욱 강경한 서신이니 감당이 안됩니다. 저들 오랑캐에게 보낼 국서 내용을 고쳐서 보내겠소. 그리고 저들의 대답을 들어본 다음에 국교를 단절하든가 말든가 해야 하오이다. 감정을 자극해서 전쟁을 일으키는 우매한 짓은 말도 안되오.”

“국서를 고치고, 왕권을 무시한다면, 역도로 몰릴 수 있지 않겠소?”

“나는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이오. 이 문제는 내가 감당하겠소.”

정충신은 왕사 김대건을 연금하고 후금국에 보내는 국서의 일부 문장을 고쳤다. 다음날 김대건을 떠나보내려는데 김시양이 급히 찾아왔다.

“이런 중대한 일은 독단적으로 할 수 없소. 조정에 연락해봅시다. 벗 최명길이 있잖소?”

“그렇다면 직접 상감마마께 글월 올리겠소.”

이런 것일수록 정공법이 필요하다고 정충신은 생각했다.

“내 이름도 넣어서 연명으로 보내시오. 목숨 걸고 하는 일을 정 공 혼자 감당하도록 할 수 없소.”

정충신은 고맙게 생각하고 곧 편지를 썼다.

-정충신과 김시양 두 신(臣)은 무례한 자들로서 변방에서 대죄(待罪:죄인이 처벌을 기다림)하옵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군복을 입은 군사는 전쟁을 이야기할 뿐이고, 강화(講和)라는 ’화(和)‘자는 말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나라의 군 책임자로서 변방이 지극히 위급한 지경으로 국가안전이 위태로운 것을 보고 입 다물고 있으면서 성상을 저버릴 수 없기에 감히 마음 속깊이 먹은 뜻을 여쭙게 되오니 살펴주소서.

생각하건대 오랑캐의 요구가 지극히 흉악하고 도리에 어긋난다 하더라도 그들의 뜻은 꼭 필요한 물품을 얻어야 한다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저들의 죄를 성토하고 화친을 끊어야 한다는 말은 일에 대한 성패를 따지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국가정책을 감정으로 치달을 수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나라와 함께 죽고 만다면 신 등도 감히 무어라고 말씀드릴 수 없으나 만일 화친을 끊는다는 말만으로 저들 오랑캐로 하여금 두렵게 여기도록 한다는 생각을 가진다면 인의가 부족하고 미개하며 교활한 후금국을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설령 감동시킬 수 있다 하더라도 나라의 안전과 평화를 꾀하는 도리로서는 알맞지 않습니다. 이런 계획은 다만 한 개인이 장수로서 적과 서로 접전하려고 할 때 쓰는 수단밖에 되지 않습니다. 지금 평안도의 군량은 아무리 끌어모은다 하더라도 이만 명 군사가 먹을 반년의 식량도 제대로 지급할 수 없습니다. 만일 화친하려고 한 약속을 갑자기 끊어버린다면 저들은 우리 군사가 나태해지고 군량도 떨어진 뒤에 비로소 몰아닥치게 될 것입니다. 간신히 국경을 안정시킨 때에 이렇게 되면 무엇으로 대적할 것입니까. 비유해보건대 힘이 약한 사람이 힘이 강한 사람과 힘껏 대결하여 한번 승리를 얻는다 해도 원기가 빠져서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치로 따져서 유비무환이란 적이 닥쳐올 미래를 염려한 때문입니다. 또한 군량부터 넉넉히 쌓아놓고 말을 달려야 억센 적을 막을 수 있다는 옛말도 있는데 지금 우리 형편이 불행하게도 그렇지 못하기에 신 등은 몹시 위태롭게 여기고 있습니다. 만약 겉으로만 번지르하게 말하여 큰 지위나 차지하려는 폐단이 없다면 어찌 적을 불러들일 까닭이 있겠습니까. 손무(孫武:손자병법 등 병학의 대가)의 말에 ‘백번 싸워서 백번 이기는 것이 좋은 계책이 아니라 국가를 안전하게 만드는 것이 첫째고, 목숨을 안전하도록 하는 것이 그 다음’이라고 하였으니, 오늘의 우나나라 형편이 이와 같다고 할 것입니다. 김대건이 소지한 국서의 내용은 그들을 성내게 하여 화를 재촉하는 일일 것이니 국서를 일단 압수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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